아침 창틀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난방이 끊긴 방의 온도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하는 저녁의 침묵이다. 하나는 생존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소속의 문제다. 가난은 언제나 둘로 나뉘어 다가온다. 절대적인 가난과 상대적인 가난.
절대적 가난은 생리적 문턱으로 정의된다. 깨끗한 물, 안전한 주거, 충분한 칼로리, 기본 의료가 충족되지 않을 때, 가난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위험이 된다. 이 가난의 언어는 온도와 영양, 감염과 사망률 같은 수치로 말한다. 누구에게나 같은 문턱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래서 절대 빈곤선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의 경계표다. 여기서는 한 끼, 한 벌, 한 알약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
상대적 가난은 사회적 문턱으로 드러난다. 공동체가 ‘보통’으로 여기는 생활수준에 닿지 못할 때, 가난은 보이지 않는 배제의 형식이 된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공적 생활의 입구가 된 시대에, 연결의 비용은 곧 참여의 조건이 된다. 아이가 수학여행을 빠지고, 취업준비생이 스터디를 포기하며, 초대 메시지가 점점 줄어드는 순간, 가난은 배고픔보다 먼저 부끄러움으로 찾아온다. 여기서의 단위는 칼로리가 아니라 체면, 정보, 네트워크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의 결핍이다.
둘 중 무엇이 진실인가. 둘 다다. 절대적 가난은 생존의 바닥을 규정하고, 상대적 가난은 존엄의 천장을 결정한다. 한 사회의 품격은 바닥-최소보장을 얼마나 두텁게 까는가로, 그리고 천장-성장과 참여를 얼마나 낮추지 않는가로 측정된다. 바닥이 얇으면 추락이 빠르고, 천장이 낮으면 성장이 작다. 그래서 가난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을 함께’ 보는 일이다.
정책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절대 가난에는 현금·현물·의료·주거 같은 직접적 안전망이, 상대 가난에는 교육·돌봄·디지털 접근·지역 인프라 같은 참여의 기반이 필요하다. 윤리의 언어로 옮기면 또 이렇게 바뀐다. 절대 가난 앞에선 나눔이 의무가 되고, 상대 가난 앞에선 배려가 규범이 된다. 한 끼를 건네는 손과, 함께 앉을 자리를 비우는 마음—둘 다 가난을 줄인다.
개인의 삶에서도 같다. 절대 가난을 줄이는 습관은 ‘필수의 확보’이고, 상대 가난을 줄이는 습관은 ‘관계의 확장’이다. 예산표에서 고정비를 먼저 지키고, 시간표에서 사람을 위한 시간을 비워 둔다. 가난은 돈이 모자라서만 생기지 않는다. 시간과 관심, 초대의 결핍도 가난을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누구의 바닥을 받쳐 줄 것인가, 누구의 천장을 높여 줄 것인가를 묻는 편이 옳다.
결론은 단순하다. 가난은 절대적일 때 위급하고, 상대적일 때 고독하다. 우리는 위급함을 낮추고 고독을 덜어야 한다. 최소를 보장하고, 보통에 합류시키는 것. 그 사이에서 사회는 조금씩 따뜻해지고, 개인은 조금씩 넓어진다.
가난은 배고픔의 숫자이자 초대의 빈칸이다. 바닥을 두껍게, 자리는 여유롭게.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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