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 가능할까요?”
인쇄소에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전화기 너머의 공기 온도가 2도쯤 떨어진다. 특히나 인쇄 수량이 소량일 때는 더더욱. 공장의 입장에서 ‘소량 인쇄’는 이미 수익성이 낮은 작업이고, 여기에 ‘감리’라는 귀찮은 절차가 끼어들면 반갑지 않은 손님 취급을 받기 쉽다.
품질을 위한 감리? 아니면 심리적 보험?
디자이너나 브랜드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수개월간 준비한 신제품,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반영한 포장 박스, CMYK의 미묘한 조화. 한 톤만 어긋나도 브랜드 이미지가 흐려지고, 납품 이후 수천 장의 재고가 쓰레기통으로 향할 수 있다.
그래서 감리를 요구한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색 보정 요구하고, 종이 질감과 후가공 상태를 체크하겠다고 한다. 말하자면 ‘현장 실사’다. 단 한 번의 인쇄로 끝나는 작업이기에, 그 한 번을 위해 나선다.
하지만 인쇄소는 다르게 본다. “감리 오신다고요? 그런데 수량이?”
대형 인쇄소일수록 이런 경우 민감하다. 기계 한 대 돌릴 시간에 몇만 장을 찍을 수 있는데, 감리까지 붙은 소량 인쇄라면 작업 스케줄 전체를 흔드는 변수가 된다. 게다가 감리 중 수정 사항이 생기면 기계는 멈추고, 사람은 기다려야 한다.
그 결과, 감리를 허용하되 조건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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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수량 몇부 이상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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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비 별도 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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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사양서와 색 기준 확정 후 진행
현실적 대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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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서의 정교화: 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확한 사양서다. 재질, 도수, 코팅 방식, 팬톤 넘버, 후가공 설명까지 ‘언어화된 감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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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쇄(Proof) 활용: 1~2장의 디지털 샘플을 출력해 확인하고, 거기서 모든 품질 기준을 확정한다. 공장은 이 교정쇄를 근거로 인쇄하므로, 이후 클레임에도 실마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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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와의 장기 관계 설정: 1회성 발주보다 신뢰 기반의 반복 발주가 중요하다. 감리를 하지 않아도 품질이 보장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쪽이 효율적이다.
감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소량 인쇄라도, 특히 패키지처럼 브랜드의 얼굴이 되는 제품이면 감리를 포기하기 어렵다. 모니터에서 본 색상과 실제 패키지의 색상은 늘 다르다. 잉크의 농도, 용지 질감, 공장 습도, 인쇄 기장의 노하우까지—이 모든 것이 다르고, 완성된 결과는 또 하나의 우연이다. 그래서 당신은 감리로, 그 우연을 통제하고 싶은 것이다.
소량 감리, 현명하게 요청하려면
사전에 감리비와 가능여부를 명확히 물어볼 것. 감리 요청 자체가 ‘예의’를 통과해야 하는 현장도 많다.
- 인쇄일정과 수량, 후가공 과정, 감리 소요시간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협의해야 한다.
- 감리에서 요구할 사항(색상 견본, 오타, 종이의 결, 톤 등)을 미리 정리해서 간결하게 전달할 것.
- 시간 약속은 반드시, 그리고 빠르게.
모두를 위한 미학의 통제
어떤 인쇄소는 ‘소량이면 감리 필요 없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경험상, 감리만큼은 시간과 비용을 들일 가치가 있다. 작은 수량이라도, 그것이 브랜드의 첫인상이라면 더욱. 공장도, 우리도, 결국 일에 성실했는지에 따라 내일의 얼굴이 달라진다.
다만 비용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더불어 시간을 지키는 현장 매너가 필요하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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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brian@hyuncheong.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