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성경은 “그 눈이 밝아졌다”고 기록한다.
그 순간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었고, 동시에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바로 그 개안의 순간이 곧 타락의 시작이었으며,
기독교가 전하는 인류 최초의 개안은 곧 인류 고통의 출발점이 되었다.
“개안(開眼)”은 불교의 언어다.
눈을 뜨는 것, 다시 말해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시력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보이지 않던 구조를 보고, 감춰진 인과를 꿰뚫는 능력이다.
불상이 봉헌되기 전 마지막 의식도 ‘개안식’이다.
눈을 뜨기 전엔 그저 흙과 나무지만, 눈을 뜬 후에는 신이 깃든 존재가 된다.
사물도, 인간도, 그 ‘순간’을 경유해야 비로소 제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이와 닮은 이야기가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우연히 여신 아테나의 목욕을 보게 되어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대신 미래를 꿰뚫는 ‘내면의 눈’을 얻었다.
눈먼 선견자.
그는 현실을 보지 못했지만, 진실을 보았다.
진짜 개안은 때때로 눈을 감음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동양의 고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장자의 『지북유(知北遊)』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모르듯, 인간은 도를 모르고 살아간다.”
안다는 것은 그 물을 떠나보는 것이다.
너무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본다’.
관계의 균형, 삶의 흐름, 반복되는 패턴…
그 모든 것이 개안의 뒤에야 비로소 펼쳐진다.
나는 살면서 이 개안의 순간들을 자주 마주해왔다.
어떤 이는 병상에서 개안했고,
어떤 이는 실패 속에서 눈을 떴으며,
어떤 이는 책 한 줄에서, 어떤 이는 타인의 한마디에서 문득 세상을 새로 보게 되었다.
이 순간들은 대개 고요하지 않다.
통증을 동반하거나, 눈물과 함께 오거나, 삶의 균열을 수반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견디면, 다음 세계가 보인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이전과는 다른 선택이 가능해진다.
그때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개안하는가
첫째, 자기 질문이 있어야 한다.
“왜 이렇게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진실인가?”
이 질문이 없는 사람은 눈을 감고 살아간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고통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개안은 고통과 함께 온다.
진실은 위로보다 날카롭고, 현실은 기대보다 무겁다.
그 무게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셋째,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절대라고 믿었던 것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정말 그런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만의 ‘우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개안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고, 용기이며, 자기 고통을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순간’이다.
역사는 단 한 번의 눈뜨기로 방향을 바꾼다.
지금 당신의 눈은 어디에 열려 있는가.
개안의 시간은 반드시 온다.
문제는 실천이다. 선택이고 용기이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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