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라는 문 앞에서상처가 아닌 정보로, 실패가 아닌 나침반으로

“그대에게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라. 아름다움과 공포, 그저 계속 나아가라. 어떤 감정도 마지막은 아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듯 삶의 모든 경험을 껴안으라 조언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삶이 던져주는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거절’이라는 이름의 경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거절은 단순한 ‘아니오’가 아니다. 그것은 내 존재를 향해 날아와 박히는 날카로운 화살처럼 느껴진다. 정성껏 준비한 제안이 거부당했을 때, 간절히 원했던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 사랑을 고백한 상대가 차갑게 돌아섰을 때, 우리는 마치 세상 전체로부터 부정당한 듯한 깊은 모멸감과 상실감에 휩싸인다.

거절이 이토록 아픈 이유는 우리의 뇌가 사회적 고통을 물리적 고통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류는 무리 지어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기에, 집단으로부터의 배제, 즉 거절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 원시적 공포의 기억이 유전자 속에 남아, 오늘날의 우리는 사소한 거절에도 생존의 위협과 맞먹는 수준의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너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신호는, “너는 가치가 없다”는 선고처럼 들리고, 우리의 자존감은 속절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하지만 이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거절은 나의 가치에 대한 ‘최종 판결’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상황에서의 ‘정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가진 열쇠가 눈앞의 자물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열쇠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문을 열 수 없을 뿐, 세상에는 그 열쇠로만 열 수 있는 또 다른 문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상대의 거절은 나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대의 필요, 타이밍, 혹은 그들만의 사정이 맞물려 일어난 결과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거절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는 대신 ‘상황에 대한 정보’로 재해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상황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거절당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받더라도 그것에 무너지지 않고, 담담히 딛고 일어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기르는 일이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는 다르다. 실망감과 아픔을 충분히 느끼고 인정하되, 그 감정이 나의 전부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거절의 순간, 감정이 격해진다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잠시 거리를 두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이 닫힘으로써 새롭게 열릴 수 있는 문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우리를 자기연민의 늪에서 건져내어 성장의 길로 안내하는 밧줄이 되어준다.

결국 거절은 우리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거친 나침반과 같다. 그것은 때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아주고,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깨닫게 해준다. 수많은 거절을 겪으며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어떤 문이 닫혀도 스스로 새로운 문을 만들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된다. 세상의 모든 문이 나를 위해 열려있어야 한다는 기대를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열린 문을 찾아 나서는 자유로운 여행자가 될 수 있다.

거절은 끝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리키는 굳은 손가락이다.

 

Leave a Reply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