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장소에서 사적인 경계공중질서는 법이 아니라 습관이다

연착된 싱가포르 공항. 앉을 자리가 모자란 공간에서 한 가족이 벤치 여러 칸에 누워 잤다는 장면이 논란이 되었다. “국가 망신”이라는 과장된 분노도, “피곤했을 뿐”이라는 손쉬운 옹호도 사실을 반쯤만 비춘다. 이 장면이 던지는 질문은 더 단순하다. 공중질서란 무엇인가,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어떻게 함께 서 있어야 하는가.
벤치를 ‘개인 침대’ 삼아 누워버린 한국인 모녀 사진을 보며 문득 어린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들었던 스피커 소리가 떠올랐다. “줄은 세로로 서세요!” 그때는 왜 그 말이 필요한지 몰랐다. 그저 하교 시간을 앞당기는 귀찮은 규칙으로만 여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한 문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산발적으로 흩어져, 누군가는 뒤로 밀리고 누군가는 앞으로 치일 대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공중질서란 그렇게 ‘나’를 조금만 눌러 ‘우리’를 살리는 작은 약속이다.
그러나 공항에서 벌어진 장면은 그 약속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준다. 비행기 연착이라는 특수 상황, 피로라는 개인적 이유, 아이를 위한 모성애까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변수들이 쌓이자 벤치 다섯 개는 ‘공공’이라는 속성을 잃고 곧 ‘내 자리’가 된다. 주변 시선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감는 순간, 그들은 ‘우리’로부터 잠시 빠져나와 ‘나’만 남은 셈이다. 문제는 그 빈자리가 곧 국가라는 이름으로 확장된다는 데 있다. “국가 망신”이라는 비난이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해외 공항이라는 공간은 누군가에겐 여정의 경유지이면서 또 누군가에겐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맞이하는 문턱이기도 하다. 문턱에서의 첫인상은 강하다. 한 명의 작은 무질서가 곧 전체의 얼굴이 되는 구조다.
공중질서를 지키라는 말이 곧 “자신을 억제하라”는 뜻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버티는 그 몇 칸의 거리, 몇 분의 대기, 몇 센티의 좁힘이 쌓일수록 낯선 이들 사이에선 신뢰가 돌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나를 배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저 사람도 나와 같은 규칙을 지킬 거라”는 확신으로 바뀔 때, 공공장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연대의 장이 된다. 그 신뢰는 결국 내가 다음번에 피곤에 지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 받을 가능성으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지키는 건 질서라는 이름의 선순환이다.
물론 육아의 현장에서는 이론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가 졸려 울고, 짐이 많고, 시간이 촉박하면 ‘공공’은 금세 먼 나라 얘기가 된다. 그래서 필요한 건 단순한 통보식 안내문이 아니라 ‘함께 육아하는 사회’다. 공항에도 ‘가족 대기 존’이나 ‘수유·휴식 공간’이 늘어날수록 모녀는 벤치를 점령하지 않아도 된다. 질서는 단속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필요를 덜어줄 인프라와 배려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인프라가 완벽하지 않은 지금, 우리에게 남은 건 최소한의 자기 절제다. “내가 조금만 불편하면 누군가는 크게 편해진다”는 걸 아이에게 보여주는 실천 말이다. 그 실천이 누적될 때 ‘한국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공항 벤치 위의 낯선 단어가 아닌,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연상이 될 것이다.
결국 공중질서는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살아갈 세상을 미리 가꿔 놓는 일이다. 오늘 내가 세운 그 한 줄의 거리가 내일 내 아이가 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준다. 해외여행지에서, 혹은 일상의 공공장소에서, 당신은 단 하나의 벤치를 위해 주변을 얼마나 ‘인지(Perceive)’하고 ‘배려(Consider)’했는가? 당신의 행동은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품격을 결정하고, 나아가 당신의 자녀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문법’으로 각인된다. 더불어 벤치에 누워버린 모녀를 향해 던지는 비난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 벤치 옆에서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지를 선택하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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