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라는 잔인한 신화능력주의는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밤샘 공부로 코피를 쏟는 수험생, 성공을 위해 가족과의 저녁을 반납하는 직장인,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갓생’을 외치는 청년.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엔진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즉 능력주의(Meritocracy)다. 혈연이나 신분이 아닌 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이 약속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정의(正義)의 원칙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이 ‘공정한 경쟁’이라는 신화 위에서 안도하며, 승자에게는 아낌없는 박수를, 패자에게는 냉정한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이토록 공정해 보이는 시스템이 사실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면 어떨까? ‘수저계급론’이라는 냉소적 단어가 일상어가 된 지금, 우리는 이미 그 배신의 징후를 목격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똑같은 규칙이 적용되는 공정한 경주를 약속하지만, 정작 모두가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아이의 교육 환경과 미래를 결정하는 현실에서, 과연 개인의 노력이 성공의 유일한 척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마치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선수와 최첨단 운동화를 신은 선수를 같은 트랙에 세워놓고, 뒤처진 이에게 “네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잔인함은 승자와 패자 모두를 병들게 한다. 패배한 이들에게 능력주의는 구조적 불평등이라는 진실을 가리고, 모든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의 ‘능력 부족’과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린다. 가난과 실패는 더 이상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게으름이 남긴 수치스러운 낙인이 된다. 이는 자기혐오와 무력감을 낳고, 사회를 향한 분노와 원망으로 이어진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통렬하게 지적했듯, 능력주의는 패배자에게서 존엄성을 앗아가는 ‘폭정(tyranny)’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승자는 행복한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재능 덕분이라는 오만(hubris)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착각은 타인의 불운에 대한 공감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나도 했으니 너도 할 수 있다”는 말은 격려가 아닌 폭력이며, 이는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좀먹는다. 또한, 승자들은 언제든 자신보다 더 유능한 경쟁자에게 추월당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영원한 경쟁의 쳇바퀴를 달려야 한다. 그들의 성공은 결코 안정된 행복이 아니라, 끝없는 불안을 동력으로 삼는 위태로운 질주일 뿐이다.

결국 능력주의라는 신화는 우리 모두를 패배자로 만든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우리는 서로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분열한다. 진정한 문제는 ‘누가 더 높이 올라갈 기회를 얻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 사회는 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하나의 사다리만을 신성시하는가’에 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하면 더 공정한 사다리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대신, 사다리에서 떨어진 사람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개인의 성공을 찬양하는 대신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하고, 운과 환경의 역할을 인정하며 서로의 다름과 약함을 보듬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한 사람의 가치가 그의 능력이나 성취로만 평가받지 않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능력주의라는 잔인한 신화가 배신한 우리 모두를 구원할 유일한 대안이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능력주의 신화는 다른 출발선에 선 이들에게 공정한 경쟁을 강요하며,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잔인한 기제로 작동한다. 이는 패배자에게는 모멸감을, 승자에게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오만을 안겨주며 사회적 연대를 파괴한다. 이제는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공정한 기회’가 아니라, 사다리에서 떨어진 이들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즉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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