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실실]
“다 이기고 돌아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한 말이다.
탄핵반대를 주장하며 광장으로 나선
한 역사 강사가 이렇게 답한다.
“그 말씀, 예수님 같습니다.”
광장에 울려 퍼지는 구호는 “주여!”이고
노래는 찬송가다.
태극기와 함께 프엔차이즈화된 기독교의 본점 미국의 성조기가 휘날리고,
구호는 기도처럼, 기도는 선동처럼 뒤섞인다.
우리는 지금
신앙인가, 선동인가 모호한 전장을 목격하고 있다.
거룩한 신앙의 탈을 쓴 자본과 권력의 동맹,
거룩과 광기가 한데 섞인 광장의 음향과 풍경이다.
한국 기독교는 언제부터
이토록 거리의 정치를 열렬히 숭배하게 되었는가?
왜 교회가
기도보다 정권의 안위를 더 먼저 외치는가?
왜 성도들은
복음보다 정치인의 한 마디에 더 감동받는가?
답은 명확하다.
정치와 자본에 뒤엉킨 신앙은
결국
‘신’보다 ‘권력’을,
‘믿음’보다 ‘돈’을
섬기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위 현장은 종교 집회처럼 보인다.
기도가 구호가 되고,
찬송이 투쟁가가 되며,
예수의 이름이
한 정치인의 무오류를 정당화하는 방패로 사용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직적인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만들어낸
반지성적 광기이며,
그 이면에는
복음이 아니라 음모론과 구원의 착시가 자리하고 있다.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예수 없는 예수교회』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야말로
우아하게 지면서
마침내
모두 함께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새로운 삶,
멋있게 짐으로써 함께 이기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오늘날 개신교 지도층이
가장 이해를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한국이나 서양에서나
크게 다를 바 없어
더욱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 원인은 주로 물리적, 물질적 힘에 의한 승리,
그에 따른 평화를 오랫동안 숭배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에서 교회 지도자의 주류는
승리주의 가치를 기독교 본연의 가치로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적 기반이 강한 교회이기에,
힘을 통한 승리와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역사적 예수 운동의 원래 의도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교인일수록
예수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인 양 착각하는 듯합니다.”
p.252-53
그는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예수의 윤리와 삶을 잃고
권력과 동원, 세속적 구원으로 기울어졌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예수를 팔아 현실 권력을 샀고,
십자가를 들고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고 있다.
한때 선교를 외치던 교회는
이제 선동의 진지가 되었고,
회개의 언어 대신
정적 제거의 주문을 외운다.
이제 묻자.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
청년과 노동자, 고아와 과부의 편에 섰던
그분은 왜 오늘
광장에서 침묵당하는가?
하나님을 팔아 제국을 꿈꾸는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니다.
그건 정치의 가면을 쓴 종교이고,
우상숭배에 가까운 종교적 광신이다.
기독교가 지금처럼
한 정당의 편에 서고,
한 인물을 주님의 종이라 부르며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
그 책임은 교회만이 아닌
침묵한 우리 모두에게 있다.
정치는 신앙의 이름을 훔치고,
교회는 예수의 자리를 비워주었다.
이제,
우리가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아야 한다.
광장이 아니라,
골방에서 들렸던 그분의 음성을.
그러나 나는 이 글이
모든 기독교를 향한 매도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광장에서 쏟아지는 일부의 함성이
수많은 조용한 신앙인의 골방의 기도마저 덮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자리를 비운 건 소수의 욕망이지,
모두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길,
그 길은 결국
고요히 사랑을 실천해온 믿음의 사람들 속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