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후지(坎而後止)” ― 구덩이를 만나면 그제야 멈춘다는 뜻이다. 《주역(周易)》의 ‘감괘(坎卦)’에서 비롯된 말로, 세상살이의 위험과 곤란을 상징한다. 물이 흘러가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멈추지 않고 채운다. 차고 넘칠 때 비로소 다른 길을 찾는다. 곤경 앞에서의 정지와 기다림, 그리고 때를 아는 지혜가 담겨 있다.
비가 많이 온 여름, 시골길 논두렁에 물이 고인다. 처음엔 조금씩 스며들던 빗물이 이내 움푹한 곳에 모여 고였다가, 마침내 흘러넘쳐 논바닥을 적신다. 농부는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본다. 물이 한 번에 빠져나가면 땅은 메마르고, 기다려 고여야만 흙은 충분히 적셔진다. 구덩이의 정지는 곧 넘침을 위한 준비다.
인생의 길에서도 우리는 종종 구덩이를 만난다. 실패, 좌절, 질병, 관계의 단절 같은 것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린다. 그러나 감이후지는 멈춤을 단순한 좌절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물이 고이는 시간이다. 언젠가 채워져 넘칠 순간을 위한 정지다. 고이지 않는 물은 넘칠 수도 없다.
현대 사회는 기다림을 잘 모른다. 더 빨리, 더 즉시, 더 많이를 요구한다. 하지만 구덩이를 피해 달리기만 하면 땅은 메마르다. 실패를 모른 채 얻은 성공은 깊이가 없다. 오히려 구덩이에 고였던 시간, 멈춰 선 순간이 나중에 더 큰 흐름을 만든다.
감이후지는 우리에게 말한다. 인생의 구덩이를 만났을 때, 그 자리에 물처럼 잠시 머물러라. 때가 되면 스스로 넘쳐 길을 연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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