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원래 안 그랬어. 교회 다니고 나서부터 이상해졌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어떻게 저런 비상식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지극히 익숙한 탄식이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이 그랬다. 어린 시절 함께 만화를 보며 웃던 친구, 토론장에서 논리를 좇던 대학 동기,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을 지녔다고 믿었던 직장 동료. 그들이 교회라는 구조에 발을 들인 순간, 어딘가 낯설고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종말이 곧 닥친다며 재난을 기도 제목 삼고, 타 종교는 ‘마귀의 역사’라고 단죄하며, 백신은 인체에 삽입되는 사탄의 표식이라 외치고, 심지어 대통령에게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신적 권위를 부여한다. 가족이나 친구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면, “믿음 없는 자는 멸망한다”고 단언하며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를 찬동하며,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태극기와 성경을 한 손씩 들고 광장에 섰다. 이는 단지 정치적 선택이나 신앙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왔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신앙 시스템의 총체적 실패이자 광기였다.
그날 이후, 더 이상 그들은 예수를 말하지 않았다. 구원은 복음이 아닌, 이념과 음모론과 정권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멀쩡하던 사람의 이성과 윤리, 사회적 감각이 그토록 철저히 무너질 수 있는가? 도대체 교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심리학자 어빙 고프먼은 『수용소 수기』에서 ‘전체주의적 기관(total institu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교도소, 군대, 정신병원, 그리고 때때로 종교 조직까지 포함되는 이 구조들은 개인의 일상을 포섭하고 자율성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정체성과 사고 방식을 주입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종교 공동체는 개인을 회심(Conversion)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옳고 그름’은 신의 뜻으로 환원되고, 복잡한 현실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된다. 이런 도식은 놀라울 정도로 위안이 되며,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과 통제를 상실한 감각을 보상해준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필요한 환상’과도 닮아 있다. 그는 종교가 계급 구조 속에서 개인을 위로하는 동시에, 현실의 모순을 덮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교회라는 구조는 내부의 권위자(목사, 장로 등)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권위는 종종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신자들은 이러한 권위에 순응할수록, 비판적 사고를 잃고 권위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신자들은 집단 내에서 강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집단 내 규범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또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집단 내에서의 반복적 의식과 신앙적 언어는 개인의 인지와 감정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킨다. 뇌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신앙적 신념은 사회적 인지, 추상적 의미 처리, 감정 통합과 관련된 뇌 영역을 활성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집단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과정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집단 내에서의 강한 압력과 권위는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비판적 사고를 억압한다. 집단 내에서의 신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 이 충돌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게 되면,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망상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이는 집단 내에서의 소속감과 안정감이, 외부의 비판이나 현실의 모순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방어기제와도 연결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그 자유로부터 도망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고립되고 불안하다. 종교 공동체는 그 공허를 메우는 가장 손쉬운 해답이 된다. ‘예수 안에서 가족’이라는 말처럼, 교회는 새로운 소속과 정체성을 제공한다. 문제는, 이 소속이 지나치게 밀착되면 개인의 판단은 공동체의 ‘공인된 진리’에 종속되며, 이질적인 생각은 배교로 낙인찍힌다. 더 나아가, 교회의 논리는 대부분 자폐적이다. 외부의 비판은 ‘사탄의 공격’으로 치환되고, 교리와 맞지 않는 과학이나 현실은 ‘믿음 없음’으로 매도된다. 이런 구조에서는 비합리적 사고조차 ‘순종’으로 칭송받는다. 즉, 비상식이 도리어 미덕이 되는 공간이다.
실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이건 좀 이상한데?’ 하지만 질문을 멈춘다. 왜? 공동체에서 배제당하고, 구원의 확신을 잃는 두려움 때문이다. 믿음의 이름으로 강요된 불합리는 인지부조화를 야기하지만, 대다수는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한다.
이른바 ‘신앙의 인질화’다. 의심은 죄이며, 맹신은 미덕이 된다. 이때부터 교회는 더 이상 개인의 내면을 치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된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자신의 눈과 귀를 믿는 것이 바로 이단”이라고 했다. 교회 내부에서 ‘자기 판단’은 곧 신앙의 위기다. 그러니 멀쩡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 현실을 왜곡하고 자기 가족마저 이교도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판 없이 신앙을 말할 수 없다. 신앙은 내면의 울림이기 전에, 구조적 권력과도 맞닿아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지배, 착취, 망상은 철저히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구조의 중심에 놓인 ‘말씀’은 텍스트로서의 성서이지, 특정 해석권력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이상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며, 공동체가 요구하는 정답만을 반복하는 순간, 누구든 사유를 멈춘 좀비가 될 수 있다.
“네가 믿는다고 말할 때, 정말로 너 스스로 믿은 적이 있는가?”
질문은 믿음보다 먼저 와야 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무비판의 맹신은 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구조를 위한 복종일 뿐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소속감과 의미를 제공하지만, 때로는 개인의 사고와 이성을 마비시키는 폐쇄적 구조로 기능할 수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사람을 망상에 빠뜨리는 이유는 권위주의적 구조, 인지부조화의 회피, 공동체 동조압력, 해석의 독점 때문이다. 믿음은 구조에 앞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 시작되어야 하며,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결국 전체주의적 사고로 전락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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