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만든 불평등을 다시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가진보의 이름으로 심화되는 격차와, 재설계되지 않는 윤리의 부재

기술은 언제나 ‘진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증기기관은 육체노동을 해방시켰고,
전기는 야간 노동을 가능케 했으며,
인터넷은 공간의 제약을 무너뜨렸다.
AI는 이제 ‘인간의 판단’마저 자동화하는 시대로 우리를 데려왔다.

그러나 기술은 진보했지만,
그 진보는 언제나 평등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인터넷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고속 인터넷 인프라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었지만
앱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은 정보 격차에 방치된다.
AI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지만
정작 그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다루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문제는 단순한 접근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은 문제 해결보다,
문제의 ‘소유권’을 재분배하고 있는 것이다.

AI 기반의 자동화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시켜주지만,
그 기술을 설계하는 이들이 모든 데이터를 쥐게 되며,
플랫폼 기업은 전 세계의 클릭 수익을 가져가지만,
그 플랫폼에 의존하는 소상공인들은 가격 결정권을 상실한다.

기술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하지만
기술은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일 뿐,
그 문제를 ‘누구의 관점’에서 해결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정의로운 알고리즘’이라는 말은 환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은 인간이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권력과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데이터는 중립적이지 않다.
AI가 배운 것은 인간이 남긴 편향된 기록이고,
그 AI는 다시 현실을 재생산한다.

기술이 불평등을 만든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자동화는 일자리를 대체했고,
빅데이터는 소비를 감시했으며,
디지털화는 노동의 정당한 보상을 흐리게 만들었다.
플랫폼 경제는 프리랜서를 낳았지만,
그들의 삶은 자율적이 아니라 불안정하다.

그렇다면 기술로 만들어진 이 불평등을
과연 기술로 다시 해결할 수 있을까?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술의 설계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기술은 ‘무엇을 가능케 하는가’만이 아니라,
‘누구를 배제하는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기술의 윤리란 기능적 정교함이 아니라
사회적 설계에 대한 책임이다.

만약 AI 기술이
농촌의 고령 노동력을 대체하려 한다면,
그 기술은 단지 자동화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공동체가 무엇을 잃게 되는가까지 고려해야 한다.

플랫폼이 경제를 연결한다면,
그 플랫폼은 단지 거래만 매개할 것이 아니라
그 거래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책임을 떠안게 되는지도 나누어야 한다.

기술로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직 그 기술이 권력과 자본의 독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즉, 기술은 기술만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정책, 공동체, 교육, 규범이라는 비기술적 요소와 결합되어야
비로소 ‘진보’라는 말이 실현된다.

기술이 만든 불평등을 기술로 해결하기 위한 전제는
기술이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다루는 인간이 더 윤리적이고 공동체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할 수 있는 일보다,
기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술을 통해
불평등을 넘어선 공존의 설계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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