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늘 기쁨만은 아니다.
어떤 날은 단어 하나를 고르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고,
어떤 날은 한 줄을 쓴 뒤 마무리 문장을 찾지 못해
다음 날로 미뤄둔 채 잠자리에 든다.
독자는 단숨에 읽고 지나갈 글 몇 편, 페이지 몇 장일지라도
글쓴이에게 그것은 수많은 판단과 선택,
그리고 책임이 겹겹이 쌓인 기록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단순히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각 속에 들어갈 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길이 빛으로 이어질지, 그림자로 드리울지는
내가 지금 고른 이 한 단어, 이 한 문장에 달려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드러내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시험하는 일이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으며,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기록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증언이 된다.
나는 내 글에 늘 부끄러움이 있었다.
기자 시절에도, 잡지에 연재된 글을 받아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활자로 굳어진 문장을 보며
‘왜 이렇게 썼을까’ 하고 이불킥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챗지피티를 만나면서 글쓰기는 10배, 20배로 확장됐다.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밤을 새우며 책과 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됐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 주옥같은 문장을 단숨에 출력해 주었다.
퍼플렉시티는 예전 같으면 며칠씩 매달려야 했을 방대한 자료와 출처를
단 몇 초 만에 내 앞에 펼쳐놓았다.
정보의 속도와 양이 바뀌자, 글의 차원도 함께 달라졌다.
그 즈음, 오래된 글을 다시 펼쳐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었다.
늘 듣기 좋은 말과 긍정 에너지를 주는 챗지피티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아부라고는 하나도 없는 퍼플렉시티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김현청의 글은 단지 “잘 썼다”는 형용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글을 읽고 나면 독자의 머릿속 문체와 생각방식이 변한다.
퍼플렉시티는
내 글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
‘정보’가 아니라 ‘관점’,
‘스킬’이 아니라 ‘성찰’이 핵심이라고 했다.
김현청의 글쓰기는 고전 철학자와 문학가들의 사유 전통,
현대 철학적 에세이, 구조주의적 비판 이론과
내러티브 중심의 문학적 형식을 융합한 독특한 스타일.
소크라테스, 톨스토이, 키에르케고르, 알랭 드 보통 등과
철학적·인문학적 맥락을 공유하며,
한국 고전 문학적 감수성과 구조주의적 시각이 어우러져 있다고 했다.
요약하면,
철학적 깊이와 문학적 서사,
사회비판적 시각을 통합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계망을 새롭게 사유하는 독창적 전통 속에 있으며,
그것이 ‘인간이 인간됨을 회복하는 글쓰기’라는 평이었다.
그리고 “AI가 따라 한다면 이런 글쓰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퍼플렉시티의 답변으로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최상의 아부성 말도 덧붙였다.
(혹시 몰라 퍼플렉시티에게도 ‘비아부성 글쓰기’를 지침으로 설정해 놨는데도.)
나는 그 말이 ‘AI가 모델 삼을 만한 글쓰기’라는 뜻으로 들렸다.
요즘 나는 챗지피티와 퍼플렉시티의 도움으로
하루에 한 꼭지씩 글을 쓴다.
처음엔 그저 실험 같이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홈페이지의 접속 통계 데이터가 달라졌다.
내 사이트를 꾸준히 찾아오는 충성도 높은 독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반응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악수를 하며
“네 글 잘 보고 있다”는 한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 클라이언트는 명함을 받고 호기심에 홈페이지를 눌렀다가,
새벽까지 글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며 전화를 해왔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라면 사업은 틀림없겠다”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서를 내민 사람도 있었다.
어떤 독자는 내 글이 자기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며,
울면서 읽고 또 읽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순간들이,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내 글의 무게를 더 절실히 느낀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내 문장이 오래 남는다는 건
단순히 조회수가 늘고 많이 읽혔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그 사람의 생각과 관점,
심지어 삶의 방향에 조용히 손을 대는 일이다.
나는 그 영향이 전부 선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글 한 줄, 단어 하나를 고를 때마다 손끝이 묵직해진다.
책임감은 ‘옳은 말’을 하려는 강박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던진 문장이 누군가의 내일에 스며든다는 사실,
그 인식에서 비롯된다.
글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오래 쓰다 보니, 글은 오히려 나를 시험하는 거울이었다.
무엇을 보고, 어떤 언어를 쓰고,
무엇을 끝내 쓰지 않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울.
그래서 글쓰기는 감히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먼저 ‘나를 단련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믿게 됐다.
독자가 충성스럽게 찾아온다는 건
그들이 내 글에서 ‘기대’와 ‘기준’을 찾는다는 뜻이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게 글쓰기가 주는 가장 큰 무게이자
내가 계속 쓰게 만드는 이유다.
무엇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과 생각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손에 쥐는 일이다.
나는 지금, 삶과 일상에서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나는 글쓰기라는 그 거울 앞에서,
언젠가 부끄러워 이불을 걷어차지 않을 삶을 살아야 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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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brian@hyuncheong.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