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의 얼굴을 한 거울내가 누구게?

한 개그맨이 유행시켰던 말이 있다.
“내가 누구게?”
그리고 이내 우스꽝스럽게 외친다.
“나는 마빡이야!”
그 장면은 웃음을 터뜨리는 슬랩스틱이지만,
이상하게 그 질문은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내가 누구게?”

언뜻 장난처럼 들리지만,
이 질문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누군가 불쑥 다가와 다짜고짜 묻는다면,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무어라 답하겠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머뭇거린다.
그것은 이름을 대는 일도,
직업을 말하는 일도 아닌 것 같고,
어쩌면 성격이나 인격을 드러내는 문제이기도 하며,
도덕적 정체성을 묻는 심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은 늘 나보다 앞서 있고, 늘 나를 따라붙는다.

 

오지에서 돌아와 마주한 질문

파푸아의 깊은 오지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그 질문과 다시 만났다.
“나는 누구지?”
문명과 거리 두기를 하며 살아본 며칠.
전기 없는 밤,
맥박처럼 깜빡이던 별빛 아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 질문은 철학자가 된 듯한 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다짐이었고,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리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돌아보면 내 삶의 이름은 늘 바뀌었다.
노래 잘하는 착한 아이였던 시절,
문제아였던 미션스쿨 시절,
세상의 구원과 영원을 꿈꾸던 신학생 시절,
지방지 기자로 시작한 사회생활,
작은 기획사의 대표로 뛰어다니던 20대 후반.

나는 가족의 일원이었고, 친구의 중심이었으며,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아는 늘 역할에 따라 변주되었다.
때로는 기자라는 직함이 나를 만들었고,
때로는 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내 태도를 규정했다.

그러니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환경과 역할, 관계와 기억이 빚어낸
‘관계의 패턴’이라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왜 물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지”라는 질문은
단지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탐구가 아니다.
그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누구라고 믿는가에 따라
내가 사는 방식, 선택의 기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생존자’로 본다면,
나는 늘 방어적일 것이고,
내가 나를 ‘사명자’로 본다면,
나는 때때로 고통을 감수하겠지.

정체성은 삶의 나침반이다.
그 나침반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모른 채
속도를 높이는 건 어쩌면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가을 앞에서

지금은 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사방에서 ‘누적’과 ‘정리’의 언어가 들려온다.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이 질문을 꺼낸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음이 멈추는 순간,
삶도 정지된다.

우리는 늘 그 질문 속을 지나
다시 나를 살아낸다.

“나를 묻는 일은
세상을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세상이란 결국
‘내가 누구인가’를 어떻게 사느냐의 기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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