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나를 마주하는 일의 시작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우리는 가끔 낯선 ‘나’와 마주친다. 분명 나인데, 내가 아는 나와 다르다.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의 문구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래서 명령이 아니라, 평생형 과제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그것이 앎”이라 했다(知之為知之, 不知為不知). 노자는 “남을 아는 자는 지(智), 스스로를 아는 자는 명(明)”이라 덧붙였다. 고전은 입을 모은다. 진짜 앎은 나의 빈칸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심리학자 융은  이 빈칸을 ‘그림자’ 혹은 ‘요하리 창’의 사각지대라 부른다. 타인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나,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나. 이 보이지 않는 영역이 때로는 관계를 흔들고, 선택을 그릇치게 하고, 삶의 속도를 교란한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모르는 데 있다.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는 고백은 그래서 패배가 아니라 출발선이다.
하지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공자는 말한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앎이다.
이 말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하여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선 잘 안다고 믿지만, 사실 가장 모르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지 못한 나를 보게 되는가.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사용했다. 단정 대신 질문, 주장 대신 반례. 스스로에게 다섯 번의 왜(Why)를 묻고, 내가 쓰는 핵심 단어 하나를 정의 내려보자. “성공이란?” “책임이란?” 대답이 흐릿할수록 행동은 요동친다. 공자의 가르침은 ‘모름의 인정’으로 이어진다. 하루의 끝에 ‘무지 장부’를 쓴다. 오늘 내가 몰랐던 것, 틀렸던 추정, 급하게 방어했던 장면을 한 줄씩 기록한다. 인정은 비난이 아니라 개선의 문이다.

노자와 장자는 고요를 권한다. 잡음이 줄면 패턴이 보인다. 하루 20분의 무목적 산책, 10분의 호흡 기록, 휴대폰 없는 식사 한 끼. 이런 작은 비움은 생각의 침전을 돕는다. 그 바닥에 가라앉은 모래가 앉고 나면, 물 아래의 구조가 드러난다. 몽테뉴는 “나는 내가 무엇을 아는지 아닌지 조용히 써본다(Que sais-je?)”고 했다. 에세이는 보여주기 글이 아니라, 정리하기 글이다. 감정이 크게 출렁인 날엔 ‘감정 장부’를 짧게 남겨 두자. 언제, 무엇 앞에서 과도하게 방어했는지, 그때 내 안의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관계는 거울이다. 신뢰하는 사람 셋에게 동일한 세 질문을 부탁하자. “내가 강해 보일 때와 약해 보일 때는?” “내가 잘하는 일과 피해야 할 일은?” “내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장면은?” 듣기 어렵다면 더욱 필요하다. 요하리 창의 창문은 타자의 언어로 열린다. 마지막으로, 작은 실험을 하자. 평소 내가 불편해 피하던 선택을 의도적으로 한 번 해보는 것. 회의에서 마지막에 말하던 사람은 첫 번째 발언자가 되고, 늘 계획만 세우던 사람은 작은 실행 하나를 당일에 끝낸다. ‘다른 선택—다른 결과—다른 자아’가 이어지는 미세한 경로가 거기서 열린다.

어거스틴은 “나를 알게 하소서, 그리하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Noverim me, noverim te)”고 기도했다. 신비의 출발이 자기 인식이라는 뜻이다. 케익츠는 ‘부정능력(negative capability)’을 말했다. 불확실함을 견디는 힘. 내 안의 미지와 공존하는 힘이 없으면, 앎은 얕은 확신으로 굳는다. 반대로 그 힘이 자라면, 앎은 겸손과 용기를 닮는다. 모르는 나를 인정하는 순간, 다른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결국, 자기인식은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다. 질문하는 습관, 비우는 습관, 기록하는 습관, 피드백을 청하는 습관, 작은 실험을 반복하는 습관. 이 다섯 가지가 모이면 ‘내가 모르는 나’는 점점 언어를 갖는다. 그 언어가 쌓이면 선택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면 인생의 무늬가 바뀐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격문이 아니라, 오늘의 한 동작이다.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아주 작고 구체적인 동작.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빈칸을 적는다. 모르는 나를 향해 질문한다. 그 질문이 어느 날 문장이 되고, 문장이 길이 된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낯설지만 더 넓어진 내가 기다린다.

모르는 나를 인정하는 용기, 그게 진짜 앎의 첫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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