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오늘 아침 무엇을 선택했는가. 커피 대신 차를, 지하철 대신 버스를, 회사 대신 카페에서 일하기를. 이런 소소한 선택들이 누군가에게는 사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장애와 질병으로 인해, 가려운 머리를 제 손으로 긁지도 못하고, 스스로 눕거나 앉는 것도 불가능하며,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찾아갈 수도 없다. 듣고 싶은 소리나 보고 싶은 풍경마저 자신이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럴만한 자유나 조건, 혹은 최소한의 여유가 있다는 의미다. 세상을 둘러보라. 과연 누구나 선택할 수 있을까? 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선택의 무게를 견디며 살고, 어떤 이들은 선택할 권리 자체를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선택할 자유는커녕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강요받고, 또 견뎌낸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구조적인 폭력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선택의 자유가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재벌 3세는 해외 명문대와 국내 대학 중 고민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오늘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와 상위 20%의 소득격차는 5.85배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선택의 폭이 5배 이상 차이난다는 뜻이다. 상위층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하위층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나는 구호 현장에서 이런 현실을 수없이 목격했다. 아프리카 어느 난민촌에서 만난 소녀는 열다섯 살에 결혼을 강요받았다. 그녀에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당장 가족의 생계가 그 결혼에 달려 있는데 말이다. 더 잔인한 것은 선택권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윤리를 강요하는 현실이다. “왜 노력하지 않느냐”, “의지가 부족하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라는 말들. 이런 발언들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치환하는 폭력이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제시한 ‘도덕적 이탈’ 개념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노력해서 성공했으니, 실패한 당신은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서울대 사회학과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소득 수준이 자녀의 대학 진학률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벽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윤리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적용될 수 없다. 칸트의 정언명령도 “할 수 있다면(if you can)”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폭력이다.
내가 만난 한 싱글맘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정규직을 포기하고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했다. 그녀에게 “경력 개발을 위해 야근을 마다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그녀의 선택은 제약된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시스템의 불공정성에 있다. 따라서 해결책도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첫째,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기본소득, 무상교육, 의료보장 등을 통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선택이 가능해진다.
둘째,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출발선이 다른 상황에서 공정한 경쟁을 논하는 것은 허상이다. 교육, 취업, 주거 등 모든 영역에서 계층 간 격차를 줄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셋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연대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윤리는 판단이 아니라 이해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선택을 비판하기 전에 그가 처한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그의 선택이 정말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인지, 아니면 구조적 제약의 산물인지 성찰해보자. 알베르 카뮈는 “진정한 관대함은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 선택권을 박탈당한 이들이 언젠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윤리의 방향이다. 당신이 오늘 내린 선택들을 돌아보라. 그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런 선택의 자유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라. 선택의 특권을 가진 자의 진정한 책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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