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걷는 이가 결국 선두에 선다느리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일찍이 “악마의 피아니스트”라 불릴 만큼 천재적 기교로 명성을 얻은 프란츠 리스트(1811–1886). 그러나 그의 제자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은 “스승의 재능보다도, 리스트가 음악에 쏟아부은 시간에 더 깊이 놀랐다”고 회고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리스트는 1840년대 유럽 순회 연주로 절정의 인기를 얻은 뒤에도 새벽마다 카를 체르니의 연습곡(Op. 299, Op. 740)을 반복했다. ‘무대의 제왕’이었던 그가 끝내 놓지 않은 것은 화려한 곡이 아니라 기술적 기본기였다.

루빈스타인 역시 연습과 노력의 가치를 역설했다. “하루 연습을 빼먹으면 내가 알고, 이틀 빼먹으면 친구가 알고, 사흘이면 대중이 안다”라는 말은 그에게도, 리스트에게도 공통으로 귀속되는 음악계의 격언이다. 학계에선 실제 화자(話者)가 누구인지 논란이 있지만, 두 거장이 평생 스케일·아르페지오 같은 기초 훈련을 지속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리스트와 루빈스타인, 두 거장의 서사에는 인상적인 교차점이 있다. 둘 모두 시대가 부여한 ‘천재’의 신화를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끈질긴 반복 연습과 기본기 숭배를 놓지 않았다. 이는 ‘천재성과 노력’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예술가의 근원적 역량이 결국 “반복된 기초의 교정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는 구조적 인식을 드러낸다. 루빈스타인이 정말로 “스승의 시간에 놀랐다”고 했든, 혹은 비슷한 감탄을 남겼든, 그것이 상징하는 예술가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기적 같은 손끝 아래엔, 늘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기본기가 자리한다.”

대부분의 재능은 초반을 화려하게 밝힌다. 그러나 빛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짝임을 지키는 일은 근육이 아니라 끈기의 영역이다. 여기서 ‘꾸준함’은 팔씨름이 아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마라톤이다. 숨이 차오르면 속도를 늦춰도 좋다. 단, 멈추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화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아직도 토끼처럼 살기 때문이다. 잠깐의 재주를 과신하다 풀밭에서 낮잠을 자는 순간, 거북이는 묵묵히 결승선을 넘는다. 우화는 재능을 폄하하려고 쓰인 것이 아니다. 재능도 가속이 필요하지만, 꾸준함은 중단 없는 동력임을 상기시키려는 장치다.

꾸준함의 비밀은 ‘작은 단위’에 있다. 하루 15분의 외국어, 매일 한 장의 독서 메모, 주 3회의 2킬로 러닝. 결과는 처음엔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복리를 알고 있다. 1.01의 속도로 쌓인 노력은 열두 달 뒤 37배의 밀도로 돌아온다. 0.99의 속도로 줄어든 열정은 결국 제로에 가까워진다. 숫자는 잔인하지만 솔직하다.

재능을 가진 사람이 꾸준하기까지 하면 그를 이길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당신도 가진 재능이 있다. 발견하지 못했거나, 쓰다 만 것뿐이다. 꾸준함은 재능의 뚜껑을 여는 열쇠다. 열쇠를 돌리는 손이 멈춘다면, 상자 속 빛은 영원히 어둡다.

오늘 무엇을 이어서 할 것인가. 어제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일을 정해보라. 작게, 그러나 매일. 꾸준함이 재능을 추월하는 장면을 삶에서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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