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성경의 또 다른 얼굴

당신은 혹시 성경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노아 한 가족만 방주에 태워 구원하신 그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성경보다 수백 년 앞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면 어떨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발견

1922년, 고고학자들이 이라크 남부에서 발굴한 점토판들은 학계에 충격을 안겼다. 그 안에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해 수많은 수메르 신화들이 쐐기문자로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문제는 이 점토판들이 기원전 2000년경, 즉 성경이 기록되기 500년 전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대홍수 이야기의 놀라운 일치: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지우수드라의 홍수 이야기는 성경의 노아 홍수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신이 인간의 죄악을 보고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 하고, 한 의로운 인간에게 미리 알려 방주를 만들게 하며, 그 가족과 동물들만 살아남는다는 구조가 완전히 동일하다.

창조 이야기의 신비한 연결고리: 창세기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에서 ‘혼돈’을 뜻하는 히브리어 ‘테홀’과 수메르 신화의 혼돈의 여신 ‘티아맛’은 어원이 같다. 또한 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는 이야기도 수메르 신 엔키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는 신화와 일치한다.

바벨탑과 지구라트의 그림자: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 역시 수메르의 지구라트(계단식 신전)와 연결된다. 수메르 신화 ‘엠메르카르와 아라타왕’ 이야기에는 “하나의 언어로 말하던 인간들이 신에 의해 언어가 혼잡해져 흩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바벨탑 사건과 거의 동일한 서사 구조다.

학계의 뜨거운 논쟁

표절론의 근거들:  많은 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특히 아브라함의 고향이 수메르 도시 ‘우르’였다는 점을 주목한다1. 구약성서 연구가들 상당수는 “창세기 초기 역사는 수메르 신화를 히브리적 관점에서 재편집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반박론의 논리: 하지만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성경 옹호론자들은 “공통된 역사적 사건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노아의 방주는 길이 3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30규빗의 과학적으로 안정적인 비율을 가진 반면, 길가메시의 방주는 정육면체로 묘사되어 항해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놓친 본질적 질문

이 논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베꼈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는 왜 이토록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만들어왔을까. 홍수, 창조, 타락, 구원이라는 원형적 서사는 왜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까.

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처럼, 인류는 공통된 내적 경험을 신화라는 그릇에 담아왔다. 수메르든 히브리든, 그들은 모두 생존의 불안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갈망을 품고 살았던 같은 인간이었다.

권력과 서사의 정치학: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단순한 문학적 차용을 넘어 권력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작은 민족이었던 히브리인들이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서사를 자신들의 정체성 형성에 활용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약자는 강자의 언어를 빌려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왔다.

믿음과 역사 사이에서

우리는 이 논쟁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신앙인이라면 이런 사실들이 믿음을 흔들 수도 있고, 비신앙인이라면 ‘역시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진리는 기원의 순서로 결정되지 않는다. 베토벤이 민요의 선율을 차용해 교향곡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음악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듯이, 성경의 가치는 다른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실천적 지혜를 향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 신앙도, 냉소적 거부도 아니다. 고대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고민해온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당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든, 이 고대의 이야기들 속에는 여전히 배울 점이 있다. 타인을 사랑하라, 정의를 실천하라, 겸손하라, 희망을 잃지 말라. 이런 메시지들은 수메르든 히브리든 상관없이 인류 공통의 지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이 말이 요한복음에 나오든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든, 그 진리 자체의 힘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이야기를 살고 있는가. 그 이야기가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고대의 점토판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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