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저울, 가심비숫자를 넘어선 가치의 연금술

책상과 사무실 구석구석, 손닿을 곳에 만년필이 있다. 터치 한 번이면 수십 개의 문장이 쏟아지는 시대에, 잉크를 채우고 종이의 결을 느끼며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행위는 지독히도 비효율적이다. 가격 또한 편의점에서 흔히 사는 볼펜 수십 자루와 맞먹으니,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면 어리석은 선택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잉크가 번지는 소리,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마찰력, 사각거리는 그 순간의 고요함 속에서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낀다. 우리는 이 마음의 저울질을 ‘가심비(價心比)’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심비는 단순히 ‘가성비’의 반대편에 선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과 기능이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몸부림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소비사회를 기호의 교환 체계로 꿰뚫어 보았듯, 현대인은 상품의 사용가치를 넘어 그 상징과 기호를 소비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가성비가 상품의 기능이라는 ‘기표(signifiant)’에 집중한다면, 가심비는 그로 인해 얻는 심리적 만족감, 즉 나만이 해석할 수 있는 ‘기의(signifié)’에 무게를 둔다. 똑같은 커피 한 잔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카페인의 효율적 섭취(가성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비용(가심비)인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끝없는 최적화와 데이터 기반의 합리성에 지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숫자로 평가되고 순위 매겨지는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의 고유한 감정과 경험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플라세보 소비’라는 별칭처럼, 가심비는 때로 실질적인 효용이 없더라도 ‘그렇다고 믿음’으로써 위안을 얻는 행위다. 이는 결핍된 자아를 소비로 채우려는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내가 선택한 이 물건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 이 경험이 나의 불안을 잠재워 줄 것이라는 기대는 자본주의가 파놓은 가장 아름다운 함정일 수 있다. 우리는 만족을 구매하는 것일까, 아니면 만족할 수 있다는 환상을 구매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구조를 조금만 비틀어 보면, 가심비는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것은 대량생산된 익명의 상품들 속에서 장인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선택하는 행위, 환경을 파괴하는 대신 윤리적 가치를 지지하는 기업의 제품을 기꺼이 구매하는 행위로 확장될 수 있다. 나의 만족이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의 파괴 위에 서지 않도록 하는 것, 나의 소비가 내가 지향하는 가치와 일치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심비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자기표현이 아닐까. 이는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주체적 선택’과 맞닿아 있다. 정해진 본질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무엇을 소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는 어떤 사람으로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당신의 일상에도 그러한 ‘가심비’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조금 비싸지만 공정무역 원두를 고집하는 이유, 기능은 투박해도 아버지의 손때 묻은 낡은 연장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빠르고 편리한 길을 두고 굳이 구불구불한 산책길을 걷는 이유. 그 안에는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삭제되었던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가치, 당신의 세계가 담겨 있다.

결국 삶이란, 세상이 정해놓은 거대한 저울과 나만이 가진 작은 저울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는 여정이다. 가성비의 저울이 생존의 무게를 감당한다면, 가심비의 저울은 존재의 깊이를 더한다. 당신의 마음 저울 위에는 오늘, 무엇이 가장 무겁게 놓여 있는가. 그 무게야말로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삶의 가장 진실한 눈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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