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구실에는 진짜 원인이 따로 있다감추어진 동기의 구조를 마주한다

“시간이 없어서.”
“요즘 정신이 없었어.”
“그냥 마음이 안 끌려서.”
우리는 이런 말들을 일상적으로 내뱉는다. 관계를 미루거나, 일을 회피하거나, 어떤 책임으로부터 비껴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자연스럽고 그럴듯한 핑계지만, 그 말 너머에는 잘 들리지 않는 ‘진짜 이유’가 숨어 있다.

모든 구실에는 진짜 원인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대체로 방어적이다. 나를 부드럽게 보호하거나, 상대의 비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언어적 안전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 어느새 나는 내 안의 구조를 볼 수 없게 된다.
문제는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심리적 구조다.

회피는 게으름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성취에 대한 두려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하는 불안, 한 번도 실패를 겪어보지 않아 생긴 완벽주의가 더 깊은 뿌리일 수 있다.
사람을 피하는 이유도 단순한 무관심이 아닐 수 있다.
예전에 겪었던 거절의 상처, 반복된 실망, 혹은 타인에게 기대할수록 더 허무했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앨프레드 아들러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우리에겐 어떤 선택에도 그만한 목적과 이득이 숨어 있다.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거리를 두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시작조차 미루며,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변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그 목적은 대부분 숨겨져 있다.
숨겨야 하는 목적일수록, 우리는 그 위에 그럴듯한 ‘구실’을 포장한다.

문제는, 그 구실이 어느 순간 진실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나 같은 사람은 안 맞아.”
“그건 내 성격이야.”
이런 문장들 속에는 익숙한 자기 방어와 동시에, 은근한 자기 단념이 섞여 있다.
더 시도하지 않기 위한 변명,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한 회피가 그렇게 삶의 설계도가 되어간다.

고전 『한비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언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숲에 가서 짐승의 그림자를 보고 사냥하는 것과 같다.”
이는 타인을 향한 말이기도 하지만, 곧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내 언행의 그림자 아래,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동기와 패턴이 있다는 것.
그걸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는 내 감정에 끌려다니고, 내 말에 속는다.

‘왜’라는 질문을 더 깊이 던져야 한다.
“왜 하기 싫었지?”
“왜 그 말을 듣고 화가 났을까?”
“왜 자꾸 그 장면을 피하게 되지?”
그 질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구실’이 아니라 ‘원인’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원인을 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을 바꿀 수 있다.

구실은 뭔가를 감춘다.
원인은 뭔가를 드러낸다.
드러남이 있어야 변화도 시작된다.

구실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
구실이 아닌 진심으로 관계를 설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자기 삶의 방향타를 쥘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순간에 멈추고 싶고, 피하고 싶고, 변명하고 싶다.
그러나 그 순간, 속으로라도 한마디만 건네보자.

“이건 정말 이유일까, 아니면 그냥 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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