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로만 이해하고, 이미지로 창조하는 뇌를 위한 변론문자와 이미지 사이, 생각의 진짜 속도

<span style='font-size:18px; display: block; margin-top:0px; margin-bottom:4px;'>글자로만 이해하고, 이미지로 창조하는 뇌를 위한 변론</span>문자와 이미지 사이, 생각의 진짜 속도

한 아이가 칠판 앞에 선다. 받아쓰기는 늘 느리고 틀린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아이의 손은 먼저 달린다. 선이 춤추고, 공간이 생기고, 낙서 같던 선들이 구조를 만든다. 교사는 점수를 주고, 아이는 세계를 만든다. 그 간극이—우리가 사는 사회의 프레임이다.

우리는 보통 글로 생각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발견은 글 이전의 장면에서 태어난다. 소리를 숫자로 바꾸기 전에 들리는 리듬, 공식을 적기 전에 떠오르는 궤적, 문장으로 묶기 전 머릿속에서 회전하는 도형들. 이미지는 문장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지는 먼저 달리고, 언어는 뒤늦게 숨을 고른다. 그때였다. 우리는 성적표로 사고의 질서를 정렬했고, 글자에 능숙한 사람에게 상을 몰아주었다.

문자는 시험에 강하다. 증거를 남기고 논리를 조립한다. 하지만 창조의 첫 장면은 종종 비문법적이다. 규칙이 아니라 감각, 개념이 아니라 형태, 설명이 아니라 장면으로 온다. 그래서 글자에 약한 어떤 이들이 오히려 이미지 앞에서는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걷는다. 느리지만 틀리지 않는 걸음으로 구조를 낚아챈다. 우리는 그들을 “결핍”이라 불렀고, 그 결핍이 구조를 재배치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당신은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가, 말인가, 아니면 그림인가? 당신 안의 사고는 글자에 갇혀 있는가, 아니면 자유롭게 회전하며 변형하는 이미지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아직도 ‘보지 못한 생각’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생각해보자. 학교는 ‘읽고 쓰고 계산하기’를 표준 언어로 삼는다. 이 표준은 필요하지만 유일하지 않다. 시각·공간 감각으로 세계를 잡아채는 뇌가 있다. 머릿속 실험으로 결과를 예감하는 뇌가 있다. 문장이 길어질수록 멀어지는 사람, 대신 한 장면으로 전체를 붙잡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글자는 번역 도구지, 모국어가 아니다. 번역이 빠른 날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번역이 더딘 날은 침묵이 지혜가 된다. 우리는 그 침묵을 “무능”이라 오독했다.

이미지 사고의 미덕은 속도가 아니다. 본질을 한 번에 붙드는 능력, 멀리 떨어진 것들을 한 화폭 안에 배치하는 능력이다. 장면은 논리보다 빨리 연결을 낳고, 연결은 새로움을 낳는다. 반대로 글자의 미덕은 견고함이다. 흐릿한 장면을 언어의 촘촘한 그물로 걸러내어, 누구나 공유 가능한 지도로 바꾼다. 그러니 둘은 대립이 아니라 역할 분담이다. 이미지가 길을 열면, 문자가 다리를 놓는다. 장면이 미래를 당겨오면, 문장이 현재를 설계한다. 창조는 둘의 협업일 때 가장 멀리 간다.

문제가 있다면, 사회가 이 협업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성적표는 문자의 편을 들어주고, 회의실은 보고서의 편을 들어준다.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은 늘 설명에 시간을 낭비한다.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순간, 이미 패배다. 표준 언어의 시민권은 문자 시험장에서만 발급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장면을 먼저 보는 사람을 불러놓고, 문장으로만 대답하라고 한다. 그는 대답을 늦게 한다. 늦은 대답은 종종 틀린 대답으로 처리된다. 틀린 사람은 점차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잃는다.

철학은 오래전에 이 장면을 예감했다. 고대의 말로 ‘판타지아’—보이지 않는 상을 그려내는 마음의 스크린—가 있었다. 생각은 먼저 상(像)으로 온다. 이름은 뒤에 붙는다. 이름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름이 상을 갉아먹을 때, 세계는 가난해진다. 나는 지금 묻는다. 우리는 왜 아이에게 “정확히 써보라”고만 가르치고, “정확히 그려보라”는 과제를 잊었을까. 왜 보고서에는 수치의 표준편차를 요구하면서, 장면의 왜곡에는 이렇게 관대할까.

결국, 문제는 권력이다. 어떤 사고 방식이 사회적 보상을 받는가의 문제. 글자에 편향된 보상 구조는 효율을 주지만, 변화를 늦춘다. 반대로 이미지에 우호적인 문화는 혼란을 동반하지만, 멀리 간다. 정답을 효율적으로 재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아직 이름 없는 가능성을 실험할 것인가. 우리는 늘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글자를 줄이자는 게 아니다. 이미지의 시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회의의 초안은 도면으로 시작하고, 수업의 출발은 스케치로 열자. 보고서는 마지막에 쓰자. 우선 세계를 보자. 보지 못하면, 쓰지도 못한다.

다시 칠판 앞의 아이로 돌아간다. 그 아이는 문장에서 자주 넘어지지만, 장면에서는 잘 달린다. 사회는 이런 아이를 “예외”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종종 예외에서 방향을 바꿨다. 표준이 시대를 유지한다면, 예외는 시대를 바꾼다. 당신에게도 분명 그런 장면이 있었을 것이다. 설명하기 전에 이미 알아버린 그 느낌. 이유 없이 먼저 떠오른 형태. 그 직관을 의심만 하지 말고, 번역만 강요하지 말고, 한 번은 그대로 믿어보자. 믿음은 오만이 아니라 실험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힘이 곧 진실이라는 보증은 아니다. 장면도 틀린다. 그래서 문자가 필요하다. 장면은 열고, 문장은 검증한다. 이미지가 부풀리면, 문자가 가라앉힌다. 둘의 긴장 속에서만 세계는 똑바로 선다. 이 단순한 진실을, 왜 우리는 이렇게 오래 잊고 있었을까. 아마도 빠른 채점이 주는 달콤함 때문일 것이다. 점수는 즉시 오지만, 통찰은 늦게 온다. 늦게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미지는 창조로, 문자는 설계로 완성된다.

당신의 생각은 지금 어디서 시작되는가. 문장에서인가, 장면에서인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어느 쪽이든, 당신은 반대편을 불러들여 대화하게 하고 있는가. 대화가 없으면, 창조는 없다. 이름이 없는 장면과, 장면 없는 이름. 둘 다 세계를 가난하게 한다.

우리는 글로 시험을 보고, 이미지로 세계를 만든다. 이미지는 창조의 문을 열고, 문자는 검증의 다리를 놓는다. 사회는 문자 편향의 보상 구조로 효율을 얻었지만, 변화의 속도를 잃었다. 해법은 대체가 아니라 협업이다. 수업과 회의의 출발을 장면으로, 마무리를 문장으로 바꾸자. 장면이 과장될 때 문장이 가라앉히고, 문장이 경직될 때 장면이 틀을 부순다. 둘의 긴장 속에서만 생각은 깊어지고, 창조는 현실이 된다.

 

내 사고의 축을 바꾼 두 권이 있다. 토머스 G. 웨스트의 『글자로만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창조하는 사람』,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하나는 “생각의 언어”를 바꿨고, 다른 하나는 “세계의 프레임”을 바꿨다.

두 책 사이의 긴장과 대화가 지금의 나를 밀어 올린 가장 큰 인사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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