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말을 떼자마자 스스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도 모를 만큼 조용히, 혼자서. 서너 살도 안 되어 한자 표지판을 또박또박 읽었다. 설명보다 해석이 먼저였고, 받아쓰기가 아니라 ‘읽기’가 그의 놀이였다.
딸아이의 방식은 달랐다. 초등 1학년 말까지도 한글이 쉽지 않았다. 담임은 난독증 가능성을 말했고, 좀 더 섬세한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며 조기 유학을 권했다. 그런데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면, 딸은 그 글자를 ‘그렸다’. 글을 쓰겠다고 연필을 잡은 딸은 가느다란 선 하나를 조심스레 그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할아버지라고 쓴 거야.” 다음엔 두껍고 강력한 선. “이건 아빠.” 조금 짧지만 굵은 선은 “오빠”.
딸에게 글자는 기호가 아니라 이미지였다. 딸아이는 문자를 장면으로 번역했다. 그림처럼 느껴지는 단어, 색채처럼 떠오르는 이름들. 딸은 세상을 ‘글로 말하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벽이고 침대고 장농이고, 딸아이의 그림은 날이 갈수록 힘이 붙었다.
그렇게 나는 알게 되었다. 학습의 빠르기보다 중요한 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걸. 누군가는 글로 세상을 읽고, 누군가는 선과 색으로 마음을 그린다.
우리 딸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누구보다 논리정연하게 말하고, 깊이 있게 글을 쓴다. 대학교 2학년 2학기를 시작하는 딸아이의 지난 3학기 성적은 대부분 A이다. 하지만 나는 성적보다, 그 아이가 여전히 사람을 선으로 그리고 있기를 바란다.
한쪽은 빠르게 이름을 붙였고, 다른 쪽은 정확히 형태를 붙들었다. 둘은 다르게 출발했지만, 결국 같은 능선에서 만났다. 우리가 염려했던 건 아이가 아니라, 문자 중심의 평가 구조였다.
학교의 시간표는 “읽고 쓰고 계산하기”로 짜인다. 필요하지만, 그게 사고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뇌는 문자를 모국어로 삼고, 어떤 뇌는 이미지를 모국어로 삼는다. 전자는 검증에 강하고, 후자는 발견에 강하다. 전자는 속도를 확보하고, 후자는 구조를 발견한다. 문제는 사회의 보상 체계다. 문서와 보고서의 세계에선 문자가 시민권을 독점한다. 이미지는 늘 ‘부연 설명’이 된다. 그래서 딸의 장면은 한동안 다르게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늦음이 아니라 다른 경로였다.
나는 지금 묻는다. 우리는 왜 “정확히 써봐”만 가르치고 “느낌대로 그려봐”는 잊었을까. 왜 수치의 오차에는 예민하면서, 장면의 왜곡에는 관대할까. 딸아이를 보며 알았다. 창조의 첫 장면은 종종 비문법적이다. 이름은 나중에 붙인다. 이름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름은 장면을 공유 가능한 지식으로 바꾸는 도구다. 다만 순서를 뒤집지 말자. 장면이 먼저, 문장이 뒤—발견이 먼저, 검증이 뒤. 이 단순한 순서가 아이 한 사람의 시간을 구한다.
다른 출발, 다른 호흡. 우리는 그 차이를 다름이 아닌 다양성으로 읽어야 한다. 문자 민첩성만 재는 시험은 효율을 준다. 그러나 세계를 바꾸는 힘은, 종종 한 컷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딸의 스케치가 문장을 데려오고, 아들의 문장이 장면을 정리한다.
이미지가 과장하면 문자가 가라앉히고, 문자가 경직되면 이미지가 틀을 부순다. 장면은 열고, 문장은 묶는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생각은 가난해진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게 가르쳐준 건, ‘정답의 속도’보다 ‘이해의 순서’였다. 늦게 오는 이해를 기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각자의 뇌는 자기 언어로 같은 세계에 도착한다.
우리의 사고는 문장에서 시작될 수도, 장면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서로 다른 그 출발점들이 만나 하나의 의미로 묶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한 아이는 그리고, 한 아이는 쓴다. 우리 어른이 해야 할 유일한 선택은, 그 차이를 고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야 결국, 아이는 자기 언어로 세상과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둘이 함께 자라면, 세상은 더 정확해진다. 아니, 더 아름다워진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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