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종교개혁 가톨릭으로의 회귀

종교개혁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루터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개혁운동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것이다.
루터 당시에 로마교회에 개혁에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 개신교회 내에 개혁의 필요가 절실하다.

 

종교개혁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종교개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가?
‘종교개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누구나 교과서적인 답변을 술술 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그대에게 계승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혹은 ‘종교개혁은 현재까지 우리 교회에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한 물음에는 어떠한 답안지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최근 종교개혁과 관련된 보도나 자료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인상 깊은 지적이 있다. 최근 교회가 ‘개혁’이라는 용어를 기피하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보수적인 신앙 속에서 부흥·발전해 오면서 자기정체성을 종교개혁 신앙, 또는 청교도 신앙에서 찾았다. 그러나 최근 기독교는 점차 개혁신앙이란 용어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 이유는 성장의 여유를 갖게 된 교회가 점차 개혁신앙의 가치들 즉, 종교개혁의 메시지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회, 특히 재림교회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당시의 상황을 되새겨야 한다. 개혁 당시 추악했던 면죄부와 오늘날 교회 물신주의 문제가 다르지 않고, 성경을 독점하며 교회를 운영하던 신부의 모습과 목회자와 일부 장로 중심으로 운영되는 비민주적인 교회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간과한 종교개혁의 이상

교리나 진리의 면에서 재림교회는 종교개혁의 총아임이 분명하다. 신학적인 면에서는 밝은 빛이 충분히 드러났다. 오랜 진흙에 묻혀있던 주옥같은 보화들이 드러났으며 암흑같은 세상에 광명한 태양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교회를 속박했던 죽은 형식주의를 대신하여 산 믿음이 일어났으며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로마교의 미신에 대한 신뢰를 버렸다. 루터가 모든 교리와 주장을 시험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좌우에 날선 날카로운 검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다. 각 처에서 영적 향상에 대한 욕구가 각성되었다.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이러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인간의 의식과 인간적 중보자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 회개와 믿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됐다.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 성경만이 교회와 신앙과 삶의 원리를 제공했으며 이 명제는 489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하고 있는 종교개혁의 이상이 있다. 만인 제사장의 교리이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는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밝혀진 매우 중요한 교리였다. 하지만 오늘날을 바라보면 489년 전 종교개혁의 슬로건과 달리 내적으로는 여전히 교권과 목사가 가톨릭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신자들 개개인의 삶이 제사장으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부턴가 교회는 이 부분에서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으로 회귀했다.
사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에 평신도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평신도를 대신할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해 잠잠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성직자나 평신도를 구분하는 개념은 종교개혁자들이 생명을 댓가로 치르면서까지 벗어나려고 했던 가톨릭의 유산이었다.
이런 정신을 제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미국 남침례교회의 경우 목사를 안수 할 때, 교인들이 모두 나와서 목사가 되는 이를 위해 안수 기도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목회자에게 성직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단도 있다. 이러한 개념은 구교의 행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또한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화목케 하기 위해 중보하는 것은 특별한 몇몇 소수의 목회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책무다. 모든 신자들은 전도와 기도로 제사장적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이 아니며 사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이후 신자 개개인이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된다. 목사의 목양뿐만 아니라 성도들에 의해 행해지는 교회와 세상을 향한 봉사 또한 목회와 동일한 사역이라는 의식이 회복될 때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이 완성될 수 있다.

전진에 실패함

종교개혁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루터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개혁운동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루터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도록 큰 빛을 맡겨 주셨으나 세상에 전할 모든 빛을 다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새 빛이 성경에 비치고 있으며 새 진리가 계속 드러나고 있다.
루터와 그의 동지들은 하나님을 위한 고귀한 사업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들은 로마 천주교에서 나왔고 또 로마교의 교리를 믿고 옹호하여 왔던 터라 모든 오류를 다 분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로마의 속박을 끊고 성경을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진리가 있었고 버리지 못한 오류가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개혁 운동이 모든 그리스도교회에 덮였던 어둠을 쓸어버리자 여러 나라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신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 운동의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루터가 그토록 고귀하게 출발했던 그 길에서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충실한 몇 사람이 때때로 일어나서 새 진리를 전파하고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오류를 드러냈으나 대다수는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이나 루터 당시에 있던 로마교회처럼 저희 조상들이 믿는 대로 믿고 그들이 행한 대로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래서 신앙은 다시 형식주의로 퇴보했다.
교회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만 행하였더라면 물리칠 수 있었던 오류와 미신들이 여전히 아직껏 두호되고 있다. 그리하여 개혁 운동을 통하여 고무된 정신은 점차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루터 당시에 로마교회에 개혁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 개신교회 내에 개혁의 필요가 절실하다. 영적 마비와 사람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는 일과 세속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 대신 사람의 이론을 채택하는 일이 만연해 있다. 종교라는 가면 아래 교만과 사치가 판을 치고 있다. 교회들은 세상과 부합하여 부패되어 있다. 그리하여 루터와 그의 동료 개혁자들이 주장하고 또한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한 그 큰 원칙들은 왜곡되고 말았다. 신자들은 스스로 진리를 탐구함 없이 그릇된 해석과 건전치 못한 교리를 믿고 있다. 교회 안에는 수백만명을 파멸시키게 될 전통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는 가톨릭으로의 회귀이며 미완성의 종교개혁이다.

-김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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