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살아낸 자의 언어텅 빈 것의 충만함을 안다는 것

어느 날, 어쩌다 하는 설거지 때문인지
그릇 하나를 깨뜨렸다.
쨍그랑, 소리 하나가
유리보다 선명하게 마음을 찔렀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실감은,
항상 그렇게 작고 날카롭게 온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머리를 스친 문장이 있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형태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비어 있고,
비어 있는 그것들이 또 다른 형태로 남는다는 말.
매일같이 그릇을 씻고, 밥을 먹고,
무언가를 사랑하고, 놓치고, 다시 만진다.
이 단순한 순환 속에서 반야심경은
더 이상 불경이 아니라,
생활의 언어,
지금 이 순간을 관통하는 ‘깨달음의 시’가 된다.

“무고, 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얻을 것이 없기에,
마침내 모든 것을 얻는다는 역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사람은 살면서 점점 깨닫게 된다.
붙잡을수록 빠져나가고,
기억하려 할수록 잊혀지며,
사랑할수록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단순한 ‘공’이 아니라,
‘통찰을 향한 감정의 수행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외로움도 견뎌야 하고,
모든 것이 흘러간다는 사실 앞에서
고요히 눈을 감을 줄도 알아야 한다.

불교는 세상을 버리자 하지 않는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그것에 휘둘리지 말라
고 말한다.
그러니 깨달음은 꼭 좌선 위에서 오지 않는다.
가끔은 출근길 버스 창밖 풍경에서도,
엄마가 찬밥에 데운 김치 올려주는 밥상에서도 온다.

심경은 말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저 너머로 가자.
그 너머의 너머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자.

그 너머는 어디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너머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 말,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 마음,
비어 있는 것에 충만함을 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면,
우리는 더 이상 ‘깨달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이미 다녀온 자처럼,
그저 웃으며,
그릇 하나 다시 씻어내듯
하루를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조차도,
그 자체로는 고통과 죽음이라는 ‘공’의 형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무한히 충만한 은혜다.

세상의 중심이 ‘나’에서 ‘너’로 옮겨가는 것.
그게 바로
깨달음이든
믿음이든
사랑이든
그 모든 길이 서로 닮아가는 이유다.

Leave a Reply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