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法治)라는 말이 현대 정치 담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같은 ‘법치’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두 개념이 혼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법률통치(法律統治)와 법치(法治)—이 둘의 구분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가르는 핵심적 분수령이다.
Rule by Law vs Rule of Law: 통치의 수단인가, 권력의 제약인가
영어로 표현하면 이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Rule by Law(법에 의한 지배)와 Rule of Law(법의 지배).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다.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는 통치자가 법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법은 권력자의 의사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헝가리의 오르반 정권이나 과거 우리나라 군사독재정권이 보여준 바와 같이, 형식적으로는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만 실제로는 권력자의 자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법이 활용된다.
반면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이 모든 권력의 상위에 존재하며, 통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법에 종속되는 원리다. 여기서 법은 권력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기준이자 목적 그 자체다. 국가권력도 법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개인의 기본권 보장이야말로 법치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
형식적 법치주의: 나치 독일이 보여준 합법적 범죄의 위험성
이러한 구분의 역사적 배경에는 형식적 법치주의의 치명적 한계가 있다. 19세기 독일에서 발전한 초기 법치국가론은 단순히 ‘행정이 법률에 따라 이루어지기만 하면’ 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법률의 실질적 내용은 문제 삼지 않고, 오직 형식적 절차만 중시하는 접근이었다.
그러나 이 형식적 법치주의는 나치 독일에서 극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냈다. 히틀러는 의회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법률의 형식을 갖춘 각종 명령과 법령을 통해 유대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 아래, 형식적 합법성만 갖추면 어떤 내용의 법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실질적 법치주의: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는 법의 내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실질적 법치주의가 등장했다. 실질적 법치주의는 법률이 단순히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제정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그 내용과 목적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도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오늘날의 법치주의는 국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써 정해야 한다는 형식적 법치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률의 목적과 내용 또한 기본권보장의 헌법이념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실질적 적법절차를 요구하는 법치주의를 의미한다”.
권력의 기원과 법의 정당성
두 개념의 구조적 차이는 더욱 근본적이다.
법률통치(Rule by Law)에서는 법의 정당성이 권력자의 의지에서 나온다. 법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한 도구다. 국민은 법의 대상이자 객체다. 권력자는 법을 만들고 변경할 수 있는 주체다
법치(Rule of Law)에서는 법의 정당성이 국민의 동의와 헌법적 가치에서 나온다. 법은 권력을 제한하는 기준이자 목적이다. 국민은 법의 주인이자 수혜자다. 권력자도 법에 구속받는 객체다.
법치의 정치적 오남용을 경계하며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법치’가 남발되는 현상을 보면, 이러한 구분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권력자들이 “법치를 지키겠다”고 외칠 때, 그것이 진정 법의 지배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법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인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법치는 본래 통치받는 이들이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원칙이어야 한다. 권력자가 스스로 “법치를 실현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한다. 진정한 법치란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제약과 견제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표: 법치의 실현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들
실질적 법치주의의 구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필수적이다:
- 대원칙: 기본권 보장, 성문헌법주의, 권력분립제
- 구체적 실현 방법:
- 행정의 합법률성과 사법적 통제
- 포괄적 위임입법의 금지와 의회 유보
- 위헌법률심사제를 포함한 사법심사절차
- 비례의 원칙과 공권력행사의 예측가능성 보장
- 소급입법금지원칙과 신뢰보호의 원칙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이 실제로 작동할 때, 비로소 형식적 합법성을 넘어선 실질적 법치가 가능해진다.
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조적 성찰
법률통치와 법치의 구분은 단순한 학술적 논의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적 기준이며, 권력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잣대다.
진정한 법치는 법조문의 나열이 아니라 관계망 속에서 구현되는 권력의 제약과 균형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법과 권력, 형식과 실질이 서로 견제하고 보완하는 구조 속에서만 법치의 이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법이 권력 위에 있는가, 권력이 법 위에 있는가”—이 간단해 보이는 질문이야말로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운명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법치를 외치는 모든 목소리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 법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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