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총량 보존 법칙사소한 것에 감정을 저당 잡히지 않기로 한 당신에게

출근길, 방향지시등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옆 차선 차량에 나도 모르게 경적 위로 손이 올라간다. 입안에서는 이미 상스러운 욕설이 맴돈다. 약속 장소에 5분 늦는다는 친구의 메시지에 이마가 찌푸려지고, 주문한 커피가 생각보다 늦게 나올 때 초조하게 발끝을 까딱인다. 우리네 일상은 이토록 자잘한 분노와 조바심으로 빼곡하다. 그런데, 한번 자문해 보자. 그 찰나의 분노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투쟁이었는가? 그 순간의 짜증이 당신의 하루를, 당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는가?

우리는 감정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음을 종종 잊고 산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 즉 감정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끼어드는 자동차에, 무심코 뱉은 타인의 한마디에, 느릿느릿한 인터넷 속도에 그 귀한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다면, 정작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거대한 부조리와 삶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한 인내나 너그러움의 문제가 아니다.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의 문제다.

왜 우리는 이토록 사소한 것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자주 고통받는다”고 말했다. 끼어드는 차량은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나를 무시하고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대한 위협으로 ‘상상’되고 확장된다. 이는 어쩌면 개인의 심리적 나약함을 넘어,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가 우리 내면에 심어놓은 피해의식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면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 타인을 잠재적 경쟁자로 여기는 삭막한 시선이 우리의 감정 회로를 예민하고 공격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아닐까. 내가 만났던 제3세계의 혹독한 분쟁 지역 사람들은 생존이라는 절대 과제 앞에서 오히려 사소한 갈등에 초연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생존’이었다. 그들의 평온함은 우리 사회의 조급함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니 이제 ‘관용의 가성비’를 따져볼 때다. 끼어드는 차에게 흔쾌히 길을 내어주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나의 감정과 시간을 지키는 현명한 투자다. 조금 늦는 친구를 기다리며 차분히 책을 읽는 시간은 조바심으로 허비할 뻔했던 순간을 지적 충만함으로 채우는 기회다. 이는 불의에 눈감는 체념이나 무기력과는 다르다. 오히려 진짜 싸워야 할 때를 위해 힘을 비축하는 과정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 당신의 삶을 옥죄는 불합리,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와 같은 ‘큰 것들’을 위해 우리의 분노와 에너지를 아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감정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기 일쑤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이 말했듯,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경적을 누르기 전 찰나의 공간, 짜증을 내뱉기 전 순간의 틈. 바로 그 공간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사소한 자극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인가. 당신의 소중한 에너지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핸들을 가볍게 놓아주자, 찌푸린 미간이 펴지고 비로소 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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