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이 자비를 만나는 순간, M이 M을 만나는 순간땅 위의 여인, 땅 아래의 글씨

요한복음 8장의 어느 정오, 돌을 든 자들과 돌 위에 무릎 꿇은 자, 그리고 침묵하는 자가 있었다.
그 침묵은 웅변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 땅에 적힌 글씨는 마치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새긴 율법을 다시 쓰는 듯했다.

간음한 여인.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등장인물은 그녀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심판할 권리가 있는 분이 돌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Miseria et Misericordia.”
“비참함과 자비가 만나는 순간.”

M과 M의 은유적 구조: 신학과 존재론의 대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Miseria는 단지 감정적 처량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 모두가 안고 태어나는 실존의 상태이다.

Misericordia, 자비는 그저 감성적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이며,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본질이다.

즉,
M(Misericordia)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구속의 손길이며,
M(miseria)는 흙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인간의 얼굴이다.

이것은 마치
신성(Divinitas)이 인간성(Humanitas)을 안는 순간,
창세기의 먼지와 요한복음의 피가 만나는 지점이다.

율법은 고발하지만, 자비는 묻는다

율법은 완전하다. 율법은 거룩하다.
그러나 율법은 치유하지 않는다.
그저 고발할 뿐이다.
그래서 여인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묻는다.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그 질문은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바꾸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불공평함으로부터 온다

이 장면은 공평한 장면이 아니다.
죄인은 용서받고, 고발자는 떠나간다.
정의의 저울이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자비의 무게 때문이다.

이 자비는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 불공평함 속에 인간의 구원이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법으로 재단될 수 없는 초월적 불균형이다.

교회의 시작은 정죄가 아닌 자비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이 문장에 투영했다.
그 또한 비참의 화신이었으며,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속에서
자비의 강이 스며든 존재였다.

그가 “M과 m이 만나는 순간”이라 표현한 것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은혜의 해석학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즉 심판을 유보하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다.

교회는 세상의 죄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 모인 장소가 아니라,
그 죄를 품은 이들을 자비로 안아주는 장소여야 한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그 여인이다

성경은 여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 여인은,
이고, 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비참함으로 시작하고,
자비로 끝나야 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죄로 침묵해야만 했던 여인이
결국 말없이 용서받고 돌아섰던 그 순간,
그녀의 걸음은 복음의 첫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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