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지나치게 자신을 사랑한다.
또 어떤 이는 참을 수 없이 자신을 미워한다.
놀랍게도, 이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자가애와 자기혐오는 거울의 양면처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자기를 과도하게 사랑하는 이는 사실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을 감추기 위해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한다.
그 사랑은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확신 없는 존재를 증명하려는 위장술이다.
그래서 자가애가 넘치는 사람일수록
조금의 무시나 비판에 쉽게 무너진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데, 왜 나를 몰라봐?”
그 분노는 결국 스스로에게로 향한다.
“나는 왜 이토록 사랑받지 못하는가?”
그리하여,
자가애는 자기혐오로,
자기혐오는 자가애로
끝없는 진자운동을 반복한다.
자신을 극단적으로 높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스스로를 쓰레기처럼 느낀다.
“나는 최고야”라고 외치던 입술은,
“나는 왜 이래”라고 웅크린다.
그 틈을 타 불면과 우울, 불안이 찾아든다.
우리는 왜 이렇게 극단 사이를 오가는 걸까?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완벽한 자아상’이
끊임없이 비교와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SNS 속 삶은 언제나 보정된 현실이고,
진짜 나는 그에 비하면 항상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덮기 위해, 우리는 더 애쓴다.
더 화려하게 포장하고, 더 잘난 척을 하고,
더 많은 ‘좋아요’와 칭찬에 목말라 한다.
그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문장은,
조금 전까지 “나는 특별해”를 외치던 사람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충분히’라는 단어에서 시작된다.
‘최고’일 필요는 없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나, 어설프고 불완전한 이 모습으로도
충분히 괜찮다는 자각.
그것이 자가애와 자기혐오 사이에서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중심축이다.
당신이 때때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
그건 당신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지치고, 상처받고, 너무 많은 기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때때로 지나치게 자신을 포장할 때도,
그건 당신이 거짓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버려질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이든 미움이든
너무 극단으로 달리지 말자.
나를 이해해주자.
그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괜찮아, 지금 이 모습도 너니까.”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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