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출발한다. 누군가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침이 밝아온다”고 말한다. 두 개의 문장은 같은 현상을 설명하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전자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사실(fact)’이며, 후자는 인간이 경험하는 ‘진실(truth)’에 가깝다. 그런데 이 둘은 언제나 일치할까?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고민해 왔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사실)은 진정한 진실이 아니라 그저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다. 반면, 니체는 “진실은 없다. 다만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며 진실의 상대성을 강조했다.
사실이란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정보를 의미하지만, 진실은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정당방위였다”는 것은 해석이 들어간 진실이다.
이렇듯 사실과 진실은 닮았지만, 언제나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법정에서 사실과 진실은 싸운다
법정에서는 사실과 진실이 가장 치열하게 충돌하는 곳이다. 판사는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지만, 변호사는 “이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통해 진실을 밝히려 한다.
미국 법 체계에서는 “진실 전체(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를 말할 것을 선서하게 하지만, 현실에서는 변호사가 유리한 사실만 강조하고 불리한 사실은 최대한 축소하는 것이 전략이 된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떠올려 보자. 리 하비 오스왈드가 총을 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단독범인지, 혹은 배후 세력이 있는지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역사 속에서 사실은 분명하지만, 진실은 늘 흐릿하다.
정치적에서 진실은 힘이 있는 자의 것이다
정치에서 사실과 진실은 더욱 복잡해진다. “경제가 3% 성장했다”는 것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사실관계지만,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다수 서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는 것이 실체적 진실일 수 있다. 숫자로 보면 경제가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경제 상황은 다를 수 있다.
정치인들은 종종 사실을 선택적으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진실’을 만든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의 켈리앤 콘웨이는 기자들에게 “대체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기술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논쟁에서는 특정한 사실관계를 강조하면서 실체적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전략이 자주 활용된다.
정치에서 진실이란 힘을 가진 자가 정의하는 것이며, 결국 진실을 믿게 만드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 모두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오늘 저녁 뭐 먹었어?”라고 물었을 때, 아내가 “그냥 대충 먹었어”라고 대답했다면, 이 말은 사실일까, 진실일까? 아내는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전달했지만, 왜 기분이 안 좋은지는 ‘진실’로 표현되지 않았다.
또한, SNS를 보면 더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인플루언서는 완벽한 라이프스타일을 올리지만, 실제로는 필터를 씌운 사진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실을 보고 진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사실과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종종 이를 혼동한다. 진실은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항상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철학적으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사실과 진실은 언제나 줄다리기를 한다.
사실관계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이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 사실이 가진 맥락과 의미를 포함한다. 법률적으로, 단순한 사실관계가 유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 정치적으로, 사실관계가 선택적으로 사용되면서 실체적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부분적인 사실만 보고 전체적인 진실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어떤 진실을 믿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번에 누군가가 “이건 사실이야!”라고 주장할 때, 한 번쯤 이렇게 물어보자.
“그건 정말 진실인가? 아니면, 그냥 네가 보고 싶은 사실일 뿐인가?”
최근 비상계엄에 따른 탄핵심판을 들여다 보며 특정한 사실관계를 강조하면서 실체적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에 피로감이 쌓인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등장하는 “2+2=5″는 사실과 진실의 왜곡, 사상의 통제, 전체주의적 권력의 억압을 상징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는 단순한 수학적 오류가 아니라, 국가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조작하고 현실을 재정의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2=5″는 진실은 권력이 결정한다는 상징이다. 소설에서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전체주의 정권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사상과 인식 자체를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당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며, 기존의 논리나 사실과 맞지 않더라도 강요된 믿음이 된다.
기본적인 수학적 사실로 누구나 “2+2=4″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당과 정권이 “2+2=5″라고 명령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사고통제를 하는 국가, 혹은 리더는 사람들의 현실 인식조차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 권력이 언로을 장악하고, 객관적 사실과 다른 ‘대체 사실(alternative facts)’을 주장하는 사례는 현실에도 계속되고 있다. “2+2=5″는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사실을 조작하고, 대중을 세뇌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윤석열은 국가가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므로 비상계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2+2=5″인 권력자의 진실 조작 방식과 다르지 않다. 국가가 위기 상황이라는 ‘거짓 위기’를 조성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비판하는 야당은 반국가세력이고, 비판하는 언론은 가짜 뉴스 유포자다. 시위하는 국민 불순 세력이고 중국의 간첩이고 북한을 추종하는 빨갱이다. 이러한 논리는 현실을 왜곡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전형적인 전체주의적 수법이다.
오웰의 『1984』에서 윈스턴은 처음에는 “2+2=4″라는 사실을 고수하지만, 고문과 세뇌 끝에 결국 “2+2=5″를 받아들이고 만다. 그러나 현실의 대한민국에서는 진실을 지키려는 국민의 저항이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비상계엄이 필요하다”는 거짓을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탄핵은 국가 전복 행위”라는 논리를 용납할 것인가?
우리는 “대통령을 반대하면 적”이라는 전체주의적 프레임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끝까지 “2+2=4″라고 외칠 것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2+2=5″는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