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기술, 혹은 품위를 지키는 법자존심과 가치관을 잠시 내려놓는 용기에 대하여

바닥이 드러난 통장을 밤새 뒤적여 본 사람이라면 안다. 한때 신념이라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모래성인지,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자존심이라는 갑옷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는지를. 우리는 종종 삶이라는 경기에서 품위 있는 패배자가 되라고 배우지만,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면 패배의 품위 따위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자존심, 가치관, 체면 같은 건 그다음 문제다. 일단 살아야 한다. 이 문장은 패배의 언어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생존의 언어다.

삶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우리 각자는 한 척의 배와 같다. 순풍이 불 때는 돛을 활짝 펴고 가치관이라는 깃발을 자랑스레 흔들지만, 거친 풍랑이 몰아닥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배를 가라앉게 할 만큼 폭풍이 거세다면, 선장은 가장 무거운 짐부터 바다에 던져야 한다. 그것이 한때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었던 화려한 장식품(체면)일 수도 있고, 고집스럽게 지켜온 항해 원칙(가치관)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배 자체를, 즉 생존을 지켜내야 다음 항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가 인간의 욕구를 단계별로 정리했을 때, 가장 아래층에 놓인 것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였다. 자아실현이나 존중의 욕구는 그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철학적 사유 이전에 벌어지는 실존(existence)의 현실이다. 나치 수용소라는 극한의 현실을 살아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증명했다. 그의 생존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동물적 몸부림을 넘어, ‘의미’를 찾아내려는 치열한 정신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그 투쟁조차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했다. 일단 살아남아야 의미도, 가치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모든 가치를 포기하고 비굴하게 생존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 속에는 신념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영혼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역사를 바꿀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우주를 지켜내야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내가 말하는 생존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기회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에 가깝다. 자존심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고, 낡은 가치관에 갇혀 새로운 기회를 외면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미련이다. 때로는 엎드려야 더 멀리 뛸 수 있고, 짐을 내려놓아야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삶의 폭풍우 한가운데 서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그것이 당신을 살리는 돛인가, 아니면 가라앉히는 닻인가? 살아남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살아남아 다시 당신의 깃발을 세울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현실적이고도 품위 있는 생존의 기술이다. 당신의 가치관은, 당신이 살아 숨 쉬는 동안 얼마든지 다시 벼리고 닦아낼 수 있다.

생존은 자존심, 가치관, 체면보다 우선하는 실존적 과제다. 거친 풍랑 속에서 배를 지키기 위해 무거운 짐을 버리듯, 삶의 위기 속에서는 생존을 위해 추상적 가치들을 잠시 내려놓는 전략적 후퇴가 필요하다. 이는 가치의 포기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기회를 확보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살아남아야만 잃어버렸던 가치를 되찾고 삶의 의미를 다시 물을 수 있다. 생존 자체가 가장 품위 있는 투쟁이다.

살아내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투쟁이자 가장 고귀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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