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색 종교라스타파리, 위카, 아고리에서 매트릭스 신앙까지

세계의 이색 종교<span style='font-size:18px; display: block; margin-top:0px; margin-bottom:4px;'>라스타파리, 위카, 아고리에서 매트릭스 신앙까지</span>

인간이 처음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별빛은 너무 멀리 있었고, 번개는 너무 가까웠다. 천둥이 몰려오면 가축들이 떨고, 병든 아이의 숨은 거칠어졌다. 인간은 그 두려움과 경이를 견딜 언어가 필요했다. 그 언어가 곧 ‘종교’였다.

종교는 하늘과 땅, 죽음과 삶, 혼돈과 질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묶었다. 태양이 오르고 지는 까닭, 강이 범람하는 이유,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비밀까지 —모든 것은 신들의 대화 속에 설명되었다. 그래야 세상은 견딜 만했고, 삶은 이해할 만했다.

밤마다 깨어있는 도시 한 켠, 자신만의 의례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대마초 연기가 자욱한 자메이카 골목, 빼어난 댄스홀과 레게의 뒤편에서, 라스타파리 신도들은 한 줌의 약초를 ‘이르샤다’, 신성한 선물로 피운다. 타인의 눈에는 환락의 연기가, 이들에게는 해방의 숨이다. 반면, 아이티 무너진 성당 옆 시장 골목 어귀, 부두교 신도들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물처럼 섞는다. 시신의 뼛가루를 몸에 바르고, 꿈과 현실의 언어를 하나로 엮는다. 이들은 비이성의 변두리에서, 오히려 치열하게 삶을 붙잡는다.

믿음의 이름 아래, 인간은 그 무엇이든 신으로 봉한다. 20세기 미국. 로버트 더드는 ‘만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며, 영화 <빅 리보우스키>의 한량 ‘듀드’를 실존적 구세주로 떠받들고 “두데이즘”(Dudeism)을 창설했다.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을 절대자라 칭하니, 파스타파리아니즘(Pastafarianism)이란 현대적 패러디 신앙도 탄생했다. 각각의 의례와 해석, 제스처와 은유는 제각기 결핍과 욕망의 자리에 맞춰진 신성의 일회용 마스크다.

신자들은 말한다. “그래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으니까.” 믿음은 집단적 소속, 예측불가한 운명, 죽음 앞의 불안까지 잠재우는 사회적 백신이다. 때론 억압이 신을 낳고, 때론 유희가 신을 만든다. 아고리(Aghori) 수행자들은 인도 갠지스강가(江街)에서 검붉은 재를 바르고, 인간의 뼈에 담긴 ‘모든 것은 하나’라는 리듬을 읊조린다. 그들의 식인(食人)은 공포의 의례가 아니라, “오염됨이 없는 순수”를 구하는 영적인 실천이다. 사회의 식탁에 반드시 들어맞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신의 이름을 자기 방식으로 새긴다.

라스타파리 신도의 대마, 두데이즘의 유머, 파스타파리의 풍자, 부두교와 위카, 사이언톨로지의 논리적 파편들… 곱씹자. 결국 이들 ‘주류 밖’ 신앙조차 고단한 현실과 욕망, 규범이라는 교차로에서, “누구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신의 이름”을 부른 것 아닌가.

 

시대·문화별 다양한 종교의 예

고대와 전통에서 파생된 종교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 1930년대 자메이카에서 시작된 종교로,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하나님의 현현’으로 본다. 대마초를 ‘신성한 약초’로 여겨 영적 교감과 명상을 돕는다고 믿는다. 반(反)서구 제국주의 성향과 아프리카 회귀 사상이 강하다.

부두교(Vodou): 서아프리카 전통 신앙과 가톨릭이 결합해 하이티에서 발전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얽혀 있다고 믿으며, 정령과 조상 영혼과의 교류 의식을 중시한다.

아고리(Aghori): 힌두교 시바파의 극단적 종파로, 세상의 모든 것이 신성하다는 믿음에서 금기와 혐오를 거부한다. 시체를 태운 재를 몸에 바르거나, 인간 두개골로 음료를 마시는 의식 등을 행한다.

현대 문화와 결합한 신흥 종교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1950년대 L. 론 허버드가 창시. 인간을 영적 존재 ‘시탄(Theta)’로 보고, 과거 생과 우주적 진실을 깨닫기 위해 정신적 훈련을 수행한다. 할리우드 유명인들이 신자로 알려져 있다.

위카교(Wicca): 현대 마법·이교주의의 대표 종교로, 대자연과 신성한 여성 원리를 숭배한다. 계절 축제와 마법 의식을 통해 자연과 조화를 추구한다.

두데이즘(Dudeism): 영화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주인공 ‘듀드’의 느긋한 인생관을 철학화한 종교. 삶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느슨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신성한 태도로 본다.

사타니즘(Satanism): 반드시 악마 숭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부는 기독교의 가치와 반대되는 ‘개인주의·자유의 절대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탄 이미지를 차용한다.

패러디와 유머에서 출발한 종교
파스타파리아니즘(Pastafarianism):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을 신으로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패러디 종교. 창조론 교육에 맞서 과학 교육을 옹호하는 풍자에서 시작됐다.

케이지니즘(Cagenism):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를 숭배하는 팬덤형 종교.

마라도나교(Iglesia Maradoniana):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를 신성시하는 종교. 그의 경기를 성경처럼 연구하고 생일을 축일로 기념한다.

처치 오브 에드 우드(The Church of Ed Wood): 미국 영화감독 에드 우드를 창조적 자유의 상징으로 숭배.

누와비언 네이션(Nuwaubian Nation): 미국 흑인 민족주의 운동에서 파생된 종교·철학 결합체로, 아프리카 중심주의·과학음모론·외계인 신화를 혼합.

 

종교를 단순히 “신을 믿는 체계”로 정의하면 설명이 부족하다. 인류학과 종교학에서 종교는 세계와 인간의 위치를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문화적·의례적 시스템으로 본다. 이 시대의 서울 한복판, 혹은 뉴욕의 조용한 아파트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새 ‘고독한 신자’가 된다. 누군가는 주일마다 교회의 의자에 앉아, 누군가는 요가 매트 위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거실에 걸린 어머니의 성모상 앞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를 떠올린다. 모임이 흩어진 밤, 그는 혼자일 때만 묻는다. “내가 기댈 어딘가가 있었으면…”

앞이 뿌옇고, 길이 끊기고, 관계는 멀어지고, 마음속 어딘가가 휑하게 비어 있다. 그 빈자리를 채워줄 모종의 신호가 필요하다. 신뢰, 희망, 소속, 위로—이 네 가지 정서들은 반복해서 같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곳의 이름은 ‘종교’다.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종교를 가진 사람의 70~80%가 종교를 통해 삶의 안정감과 긍정적인 정서, 인간관계의 회복, 소속감, 윤리의식의 틀을 얻었다고 말한다. 놀라운 것은, 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서도 약 66%가 종교가 심리적 안정에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인정한다는 점이다. 믿지 않아도, 그 자리에 놓인 구조의 힘을 부정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인도에는 인구만큼 많은 신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이 과장일지라도, 그 뉘앙스는 사실에 가깝다. 인류의 긴 역사에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와 신, 믿음이 흘러갔다.

오늘날 지구 위에는 약 4,000여 개의 종교가 존재한다. 그 탄생지는 다양하다. 때로는 오랜 문명과 전통 속에서, 때로는 전쟁과 망명지에서, 때로는 장난과 패러디, 심지어 인터넷 밈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종교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문화와 문명의 축이 되었고, 어떤 종교는 유머처럼, 혹은 사회 풍자로 태어나 짧은 불꽃처럼 번져갔다. 그러나 그 겉모습의 차이와 무관하게, 종교가 품은 기능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이 살아갈 이유를 마련하며, 삶과 죽음을 견디게 하는 틀. 그것이 종교가 만든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결국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궁극적 가치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대상이 신이든, 자연이든, 영화 속 주인공이든, 혹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든, 믿음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순간, 종교를 단순히 옳고 그름, 참과 거짓으로만 재단하는 일은 부질없어진다.

왜냐하면 믿음은 신의 실존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했는가를 드러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신이 있든 없든, 인간은 살아야 했다.

살아야 한다면, 삶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종교는 그 이유를 제공하는 오래된 장치이자, 지금도 작동하는 이야기 기계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당신이 믿는 것은 신인가, 아니면 그 신이 건네준 ‘살아갈 이유’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언제든, 당신의 언어로 다시 쓸 수 있는가? 그 질문을 품는 순간, 믿음은 종교를 넘어 당신만의 구조가 된다.

종교는 불확실과 압박, 끊어진 관계 속에서 인간이 발견한 의미의 구조다. 그 얼굴은 위로의 손길이자, 세계를 설명하는 틀이고, 삶을 지속하게 하는 이야기 기계다. 믿음은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논리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기로 선택한 방식이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의 언어로 다시 쓰일 수 있다면, 이미 그 안에 신의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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