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만으로는 판을 지킬 수 없다정치에는 정치로—명분과 실리, 지혜와 순결

어떤 자리들은 처음부터 기울어 있다. 말보다 빠른 손짓, 규정의 여백을 비집는 문구, 순서를 선점하는 작은 기술들이 모이면, 원래 서로의 선의를 믿고 굴러가야 할 자리가 힘의 경기장으로 바뀐다. 이 장면이 말해주는 것은 간단하다. 수수함은 마음의 미덕이고, 판을 지키는 힘은 구조에서 나온다.

정치는 구조다. 구조의 언어는 ‘예측 가능성’이다. 모두가 미리 알고 들어가고, 들어가서도 그 문법대로 진행되며, 끝난 뒤에는 같은 방식으로 기록되는 자리—그런 자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발언은 짧고 요지는 분리되어야 하고, 사실과 해석은 한 줄을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야 한다. 즉흥의 열기는 순간을 이기지만, 예측 가능한 문법은 시간을 이긴다. 절차가 방어가 아니라 전략이 되는 이유다.

연대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원칙을 묶는 일이다. 취향이 같아서 모이면 감정의 물결에 휘고, 원칙이 같아서 모이면 바람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약속, 유불리에 따라 규정을 바꾸지 않는다는 약속, 결정 이후에는 실행으로 협력한다는 약속—세 줄이면 충분하다. 가까운 이라도 원칙을 훼손하면 회의장에서는 멈추고, 멀리 있어도 원칙에 서면 손을 잡는다. 연대의 끈을 정서가 아니라 규범으로 엮을 때, 관계는 길어진다.

투명성은 미덕이 아니라 방패다. 말은 짧게, 기록은 길게, 일은 정확히—이 세 문장이 신뢰의 최소 단위다. 주장에는 근거의 출처가 따라야 하고, 수치에는 산식이 붙어야 한다. 논의 전엔 요약과 근거가 열려 있어야 하고, 논의 후엔 왜 그 결정을 했는지가 남아 있어야 한다. 소수의견을 각주로 밀어내지 않고 본문에 병기하면, 다음 회기의 지혜가 된다. 투명성은 논쟁을 늘리지만, 불신을 줄인다. 불신이 줄면 설득 비용이 내려간다.

경계는 울타리처럼 분명해야 한다. 인격을 겨누지 않는다, 허위를 유통하지 않는다, 사적 이익을 끼워 넣지 않는다—선을 넘으면 감정이 아니라 규범으로 응답한다. 기록하고, 정정하고, 제지하고, 제재한다. ‘기분 나쁨’의 언어가 아니라 ‘절차’의 언어로 다룰 때, 싸움은 줄고 기준은 선다.

이겼을 때 무엇을 남기는가가 품위를 정한다. 승자의 과제는 상대를 눌러 앉히는 것이 아니라, 결정의 정당성을 실행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반대 측의 우려를 보완장치로 명문화하고, 일정과 책임과 측정지표로 이행을 보여준다. 오늘의 1승보다 내일의 평판을 택하면, 다음 승복이 쉬워진다. 이겨도 남고, 져도 남는 방식은 결과를 독점하지 않고 책임을 분산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지혜와 순결은 함께 가야 한다. 지혜는 판을 읽고 위험을 우회하는 능력이고, 순결은 수단이 목적을 먹어치우지 않게 붙잡는 경계다. 진흙탕을 건널 때가 있다면 장화를 신고 지나가되, 끝나고 흙을 털어낼 시간을 반드시 갖는다. 장화의 진흙은 씻기지만, 말에 묻은 흙은 남는다. 그러니 지나되 닮지 말자.

결국 판을 바꾸는 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정확한 절차, 즉흥의 열기가 아니라 길게 쌓인 신뢰여야 한다. 수수함은 태도이고, 전략은 책임이다. 좋은 목적은 좋은 방법을 요구한다. 원칙을 전략으로 만들고, 절차를 공익의 기술로 바꿀 때,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그 자리는 다시 제 이름을 되찾는다.

결과는 영향력을 증명하고, 예측 가능성은 신뢰를 축적한다. 큰 소리보다 긴 호흡이 판을 지킨다.

앞으로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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