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과 오물분노를 쥔 손이 먼저 다친다

숯불과 오물<span style='font-size:18px; display: block; margin-top:0px; margin-bottom:4px;'>분노를 쥔 손이 먼저 다친다</span>

우리는 종종 정의의 이름으로 분노를 든다. 잘못을 질책하려고, 상처를 되돌려주려고, 어긋난 균형을 바로잡으려고. 그러나 손에 든 것은 칼이 아니라 숯불에 가깝다. 던지기 전까지, 불은 내 손을 먼저 지진다. 또 어떤 날엔, 모욕에 맞서겠다고 손에 움켜쥔 것이 오물이었음을 늦게 깨닫는다. 휘두르면 상대도 더러워지겠지만, 그 전에 내 손이 먼저 더러워진다.

분노의 문제는 감정 그 자체보다 ‘쥐는 시간’에 있다. 짧은 분노는 경고가 되지만, 오래 쥔 분노는 정체성이 된다. 손아귀에 힘을 줄수록, 우리는 원래의 목적에서 멀어진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관계를 무너뜨리고, 상처를 치유하려다 스스로를 더 깊게 베어 버린다. 결국 숯불은 빈손일 때만 꺼지고, 오물은 내려놓을 때만 씻긴다.

분노를 내려놓는다는 건 불의를 외면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분노의 에너지를 판단과 절차로 번역하자는 제안이다. 사실과 해석을 가르고, 요구와 욕설을 구분하고, 목표와 보복을 분리하는 일. 뜨거움을 식힌 다음에 행동하면, 우리는 사람을 겨냥하지 않고 문제를 겨냥할 수 있다. 불은 난로가 될 수도, 화재가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온도의 문제다.

몸의 언어를 빌리자. 호흡을 세 번 고른다. 문장을 한 번 줄인다. 한밤의 메시지는 아침까지 보류한다. 이 작은 지연이 숯불을 재로, 오물을 물로 바꾼다. 또한 기준을 정하자.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인격을 공격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만 말한다. 세 가지 기준이 무너지면,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절제가 된다.

용서는 기억 상실이 아니라 방향 선택이다. 숯불을 쥐고 있지 않겠다는 결심, 오물을 들지 않겠다는 약속. 상대의 변화를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손은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그 선언이 쌓일수록 우리는 멀리 간다. 오래 가는 관계와 결과는 대개 맑은 손에서 나온다.

결국 분노의 윤리는 간단하다. 뜨거움을 정의로 착각하지 말 것, 더러움을 용기로 오해하지 말 것. 불을 쓰되, 손을 태우지 말 것. 때로는 가장 강한 응수는, 무기를 내려놓고 기준으로 서는 일이다.

숯불을 쥐면 내가 타고, 오물을 쥐면 내가 더러워진다. 내려놓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문제를 다룰 힘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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