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대한 회의로 수년간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고민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신을 의심한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관계를 흔들어놓을지 뻔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이른아침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 너머로 전해지는 것은 나와 같은 혼란이었다. 그녀는 한때 강단에 서던 목회자였다. 하지만 신에 대한 의문이 깊어질수록 교회라는 울타리는 더욱 좁아졌고, 결국 그 안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해요. 신을 믿지 않는데 왜 기도는 계속하고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은 내 안의 모순을 정확히 짚어냈다. 기도한다는 것. 그것은 대상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면서도 기도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날 새벽, 그녀에게 어떤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했다. 기도 중에 들려온 목소리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그것이 그녀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나를 무엇이라 부르며 기도를 하더라도 나의 존재가 달라지지 않는다. 부처님, 공자님, 하늘님, 알라, 하나님, 아버지… 네가 어떻게 나를 부르더라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름에 갇힌 신, 이름을 넘어선 존재
이 대화는 종교의 핵심을 관통하는 통찰이다. 우리는 신을 부르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하나님’이라 부르면 기독교도가 되고, ‘알라’라 부르면 무슬림이 되고, ‘부처님’이라 부르면 불교도가 된다. 하지만 과연 신의 본질이 우리가 부르는 이름에 따라 달라질까.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 체계다. 각 문화권마다 다른 기호와 의례, 그리고 이름을 통해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정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형식이 본질을 가리게 된다는 점이다. 칼 야스퍼스는 “신은 모든 객관화를 넘어선다”고 했다. 신을 특정한 이름이나 형태로 규정하려는 순간, 우리는 신을 우리의 인식 틀 안에 가두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이란 신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가 아니라, 그 부름 너머의 무언가를 향한 열린 태도가 아닐까.
종교 권력과 이름의 정치학
한국 교회사를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분열이 신학적 해석의 차이가 아닌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다.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배제와 단죄들. 신의 이름을 독점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가. 피에르 부르디외가 분석한 종교 장(field)의 권력 구조를 보면, 종교 엘리트들은 신성한 것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방법, 올바른 기도 형식, 정통 교리… 이 모든 것들이 신의 본질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당신도 경험해봤을 것이다. 교회에서 “아멘” 대신 “나무아미타불”라고 말했을 때의 어색함을. 불교 사찰에서 “나무 석가모니불” 대신 “하나님”이라고 중얼거렸을 때의 위화감을. 하지만 이런 언어적 관습이 정말 신과 우리 사이의 소통을 좌우할까.
회의하는 신앙, 신앙하는 회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회의 자체가 어떤 형태의 신앙일 수도 있다. 신이 없다면 왜 그 부재를 이토록 절실하게 느끼는가. 신을 부정하면서도 왜 계속 그에 대해 사유하는가.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신 개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도덕과 의미의 근거로서의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회의는 신앙의 종료가 아니라 신앙의 성숙일 수 있다. 맹목적으로 주어진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신과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여정이 아닐까.
이름 너머의 실천
그녀가 들었다는 목소리의 핵심은 단순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관계라는 것이다.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알라’라고 부르든, 그 부름 속에 담긴 간절함과 진정성이 본질이다. 이것은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신을 부르는 사람들이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지향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두고 벌이는 논쟁보다는, 그 신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당신이 어떤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든, 혹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 탐구 과정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이 다를 뿐이다.
새로운 신앙의 가능성
미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특정한 이름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더 포용적이고 유연한 형태가 될 것이다. 신의 이름을 독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신앙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상대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 형식적 종교 활동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를 통해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이름으로 신을 부르고 있는가. 혹은 신을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아니라, 그 부름 속에 담긴 당신의 진심이다. 신이 존재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신성한 것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다. 신을 의심하면서도 기도를 멈출 수 없다는 것, 그 모순 속에서 발견한 목소리가 진정한 종교적 경험의 핵심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의심이라는 신앙의 동반자
의심은 신앙의 반대편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앙으로 향하는 필수적 경로다. 프레데릭 부흐너는 “의심이 없다면 자신을 속이거나 잠들어 있는 것이다. 의심은 신앙의 개미 같은 존재로, 신앙을 살아있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조차 “하나님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끔찍한 고통,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느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겪었다. 이것은 종교 권력이 우리에게 강요해온 ‘완전한 믿음’이라는 허상을 무너뜨린다. 의심 없는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닐 수 있다는 역설. 그녀가 교회를 떠나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적 경험으로서의 종교
종교적 경험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관계적이다. 누군가 신을 직접 경험했다고 느낄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신의 존재 증명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이 그 사람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아드리아노 알레시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신성에 대한 의식적이고 올바른 질서”라고 정의했다. 이는 종교가 단순히 교리나 의례가 아니라, 인간이 신성한 것과 맺는 의식적 관계임을 의미한다. 그녀가 들었다는 내면의 목소리는 바로 이런 직접적 관계의 증거다.
형식을 넘어선 신앙의 본질
실존주의 신학은 진정한 신앙과 영적 의미가 조직 종교나 의례, 텍스트에서 찾아질 수 없다고 본다. 종교적 규칙을 따르는 것이 참된 신앙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존주의 신학은 신앙이 개별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 개념이 여기서 중요해진다. 신앙이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신앙을 방어하려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신앙은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에 대한 항복이다.
신앙 위기와 영적 성장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신앙 위기는 “정상적이고 확립된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에 따른 신학적 세계관이 침해받고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무력하거나 무용지물로 보일 때” 발생한다. 하지만 이런 위기가 반드시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깝게 이끌 수 있다. 진정한 신앙을 위해서는 ‘일요학교’ 답변을 넘어선 더 깊은 추구가 필요하다. 의심이 진정한 신앙의 필수 구성 요소라는 깨달음이 중요하다.
관계로서의 종교
그녀가 들은 목소리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했다. 신을 부르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부름 속에 담긴 관계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자아를 넘어선 여행이며, 신성한 것과 깊이 연결되고 모든 존재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는 것이다. 휴스턴 스미스가 말했듯이 “영적 경험이 영적 삶을 만들지는 않는다”. 신성한 경험들, 영적 믿음들, 영적 실천들, 영적 헌신들, 그리고 영적 공동체가 함께 모여야 진정한 영적 존재 방식을 개발할 수 있다.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
성경적 신앙은 의심이나 확신과는 구별되는 범주다. 지적 확신이나 강한 지적 확신이 신앙에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확신과 확실성이 성경적 신앙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신앙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구원하는 신앙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notitia)이나 감정적으로 믿는 것(assensus)을 넘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의존(fiducia)을 포함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은 그리스도를 구주이자 주님으로 인정하는 개인적 신뢰와 항복을 포함할 때만 실재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의심과 씨름하고 있는가. 그 의심을 신앙의 적으로 보지 말라. 오히려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는 초대장으로 받아들여라. 형식적 종교 활동에 안주하지 말고, 진정한 영적 변화를 추구하라. 신을 부르는 이름보다는, 그 부름 속에 담긴 진심을 돌아보라. 그녀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다.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완벽한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에 있고, 형식적 예배가 아니라 실존적 만남에 있으며, 교리적 확신이 아니라 관계적 신뢰에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종교적 경험은 신앙이 의심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하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진정한 종교는 특정한 이름이나 형식에 갇히지 않고,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신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의심조차 신앙 성장의 필수 요소이며, 형식적 종교 활동보다는 삶의 변화를 통한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 미래의 신앙은 더욱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종교의 본질은 신을 부르는 이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근본적 갈망에서 비롯된다. 특정한 종교적 형식이나 교리에 갇히지 않고,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에 대한 회의조차 신앙의 한 형태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탐구 과정에서 보여주는 진정성과 삶의 변화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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