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한글을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았다.
그저 혼자, 스스로 읽었다.
우리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책을 바라보며,
아빠가 함께 보던 애니메이션 동화를 들여다보며,
어느 날 문득,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말문이 트이자마자 동시에 읽기도 열렸다.
한글을 읽게 되자,
아버지가 사준 천자문 만화 시리즈를 단숨에 훑어내며
어린 나이에 수백 개의 한자도 익혔다.
아들은 이렇게
등산길에 만난 한자 표지석을 또박또박 읽었고,
읽기는 그의 놀이였고, 놀이 안에서 그는 세상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은 쓰기를 싫어했다.
말로는 조리 있게 풀어내면서도,
글로 쓰는 것은 지루해했다.
한자든 영어든, 쓰는 순간 집중력을 읽고 몸에 힘이 빠졌다.
문장을 따라 쓰는 것보다 생각을 먼저 끝내는 쪽이 성격에 더 잘 맞았다.
학습지 선생님은 손에 힘이 부족하다며 하루 몇 장씩 따라쓰기를 권했다.
하지만 며칠도 가지 못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아이의 ‘학습 방식’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영어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문제는 ‘영어 단어시험’이었다.
아들은 단어 외우기를 싫어했다.
쓰기 싫어하던 성격은, 철자 맞추기라는 방식에서 더 위축되었다.
1학년 겨울 방학식 날, 학교 영어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대현이만 단어 암기 상을 못 받았어요.”
그 선생님은 내 학교 후배였다.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아니 가슴이 퍽하고 떨어져 내렸다.
‘다른 아이들이 다 받는 걸 못 받은 아들은 어떤 마음일까.’
‘내 교육 철학은 아이를 위하는 걸까, 혹은 방치일까.’
짧은 침묵 끝에 말했다.
“쓰기는 천천히 가도 돼요. 그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만 해줘요.”
그 선택이 옳았는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을 믿었고, 아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증명해주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에서 반장을 맡았고, 고등학교에선 학생회장을 지냈다.
학업 성적도 늘 상위권, 1등과 2등을 오갔다.
잡지에 연재되는 아빠의 글을 읽고는 문장에 대해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정리해가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스스로 코딩을 배웠고,
한학기 만에 앱 하나를 만들어 출시했다.
글을 싫어했던 아이가,
이제는 기능으로, 알고리즘으로, 언어보다 더 빠르게 생각을 쓰고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산업공학회가 주최하고 서울대학교와 카이스트가 주관한 대학생 경진대회에서
복잡한 금융관련 과제를 코딩으로 연산해 1등상을 수상했다.
이제 그 아이에게 ‘쓰기’는 더 이상 종이 위에 글자를 나열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쓰기는 ‘설계’였고, ‘기획’이었고, ‘구조화’였다.
그의 뇌는 이해한 세계를 자신만의 질서로 정리하고 있었고,
그 정리는 단어보다 명확했고, 문장보다 더 완성되어 있었다.
만약 그 아이에게 세상의 기준에 맞춘 ‘쓰기’를 강요했다면, 어땠을까.
그 질서는 깨졌을지도 모른다.
그만의 언어는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겐 저마다의 성장 시간표가 있다.
발달의 속도는 각자의 리듬을 따른다.
하지만 세상은 ‘교육과정’이라는 이름 아래
말과 글을 먼저 요구하고, 기준 안에 아이를 끼워 맞추려 한다.
그러나 어떤 아이는 말보다 먼저 ‘구조’를 이해하고,
어떤 아이는 글보다 먼저 ‘흐름’을 꿴다.
중요한 건, 그것이 ‘과정’이라는 점이다.
부족함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아이의 옛날 글씨를 떠올린다.
종이에 남긴 삐뚤빼뚤한 자국들.
어떤 단어는 틀렸고, 어떤 문장은 엉켜 있었지만,
그 안엔 나름의 논리와 순서가 있었다.
지금 그 아이는 손가락으로 타자를 두드리며 세상을 만든다.
앱으로, 기획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만드는 언어로.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에게 가르쳐준 건,
‘언제’보다 ‘어떻게’였고,
‘무엇을’보다 ‘어떤 방식으로’였다.
우리 아들은, 빠르게 읽고, 느리게 썼다.
하지만 누구보다 정확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세상을 아주 또렷한 언어로 쓰고 설명하고 있다.
그 아이가 문장 대신 설계도를, 손글씨 대신 앱을 택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옳았다.
느리게 쓰고, 빠르게 이해했던 아이.
지금 그는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쓰고 있다.
그 아이의 언어는, 결국 그 아이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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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brian@hyuncheong.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