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마르틴 부버: ‘너와 나’의 대화법부부는 대화하는 타자일까, 함께 숨 쉬는 존재일까

아내와 나는 ‘오늘 무엇을 먹을지’를 두고 자주 대화하지만,
가끔은 철학과 종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유독 많이 나누었던 주제는
‘다름’, 혹은 ‘관점’에 관한 이야기다.
사르트르와 마르틴 부버처럼.

전자는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고 말했고,
후자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나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극단처럼 보이는 이 두 문장 사이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다름에 대해,
관점에 대해
‘대화’라는 연습을 한다.
말하고, 듣고, 물러나고, 다시 다가가며—
우리는 ‘부부’라는 장기적인 관계를 통해
‘다름’과 ‘차이’의 철학을 살아내고 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타자의 시선 앞에 선 존재다.
나는 그의 철학을 처음 읽었을 때,
“이건 마치 결혼 초반의 나를 설명하는 문장 같구나” 하고 웃었다.

“당신은 왜 그 말을 그렇게 했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어. 당신이 그렇게 해석한 거지.”

우리는 종종 의도와 해석 사이의 갭 속에서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나는 운전대를 잡고, 아내는 조수석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결혼이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끊임없이 해명되는 삶
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내는 마르틴 부버처럼 『나와 너』를 꺼내 든다.
“사람은 ‘너’와 마주할 때만, 진정한 ‘나’가 돼요.”

그녀의 말은,
나에게 한 줄의 질문으로 남는다.
‘나는 너를 위해 말하는가,
아니면 나를 위해 설득하는가?’

나는 여전히 타인을 ‘대상’으로 보는
사르트르의 골방에 자주 머문다.
하지만 아내는 꾸준히 나를
‘주체적 관계’의 방으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너’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고통하고 기뻐하는 존재의 거울이 된다.

우리는 때때로
서로를 사르트르처럼 바라본다.
언제는 ‘침묵이 더 편하다’고 느끼고,
어느 날은 ‘이 사람과의 대화가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부버처럼 믿기로 했다.
『나와 너(Ich und Du)』
‘너’ 없이는 ‘나’도 있을 수 없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부부가 되는 일은, 철학자가 되는 일보다 어렵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를 철학하듯 바라볼 때,
우리는 서로의 사르트르를 이해하고, 부버의 시선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나-너 관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오늘도 ‘너’에게 묻는다.
“당신이 침묵할 때,
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어요.”

Leave a Reply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