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통번역자다.
매주 다문화센터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한국어와 그들의 언어 사이를 오간다.
말이 통하지 않아 병원 진료를 포기하려던 이주 여성에게
그녀는 ‘의사와 보호자 사이의 다리’가 되어준다.
나는 브랜드 개발자다.
생산자의 기술 용어를, 소비자의 언어로 번역한다.
개발자의 개념을, 시장의 감성으로 풀어내고
철학을 상품화하고, 감정을 슬로건으로 바꾸는 일.
결국 나도 통역자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뜻’과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서로를 더 자주 번역해야 하는 부부가 되었다.
아내는 종종 말했다.
“사람이 진심을 몰라주는 게 아니라,
진심이 어떤 말로 번역돼 나가는지를 모르는 거야.”
나는 그 말에 늘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괜찮아’라는 말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일 때도 있고,
‘이해했어’라는 말이 ‘당신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일 때도 있으니까.
말은 하나지만,
뜻은 여러 개고,
감정은 그 위에서 울퉁불퉁 미끄러진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번역한다.
말을, 표정을, 감정을,
그리고 서로의 ‘다름’이라는 언어를.
아내는 종종 대중 앞에서 통역을 하면서
화자의 말보다 더 많은 문장을 덧붙이곤 한다.
문화와 배경이 다른 청중을 위해
그녀는 사려 깊은 맥락과 정서적 여백을 함께 번역한다.
그녀의 말은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해받지 못했을 가능성까지 보듬는다.
나는 일을 통해 단어의 모양을 다듬는다.
그녀는 통역을 통해 사람 사이의 거리,
말과 마음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를 정제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소비자를 향해,
그녀는 이방인을 향해.
우리는 오늘도,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가까이 옮겨놓는다.
그러나 전문 통번역자인 우리 부부도,
서로의 언어를 잘못 번역할 때가 있다.
나는 “잠깐만”이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로 듣는다.
그녀는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당신은 왜 나를 피하지?”로 통역힌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단어’가 아니라 ‘맥락’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걸 배운다.
부부는 결국,
감정의 통역사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번역하며 살아간다.
신앙의 언어도,
사랑의 문장도,
일상의 오해도.
함께 번역하며,
함께 배우며,
함께 살아간다.
가끔,
아내의 통역을 듣고 있다 보면,
그녀가 전하는 문장이 원래 화자의 말보다 더 감동적이고 멋지게 들릴 때가 있다.
화자의 말보다 더 아름답고 더 진심 어린 문장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그저 언어를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까지 더 고요하고 따뜻하게 옮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우리가 주고받았던 서툰 말들,
불완전하고 어설펐지만,
어쩌면 그 말들 속에야말로
진짜 감정이, 진짜 사랑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걸.
그렇지.
원래의 말보다,
서툴게 나눈 말들이 더 오래 남는 걸 보면 말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 동안의 오해들을 서로 번역하며 잠자리에 든다.
아내는 안방에서, 나는 책방에서 각각 누워 있지만,
그 격벽과 침묵조차도 우리는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말은 줄고, 해석은 깊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서로를 온전히 번역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하루도
“말을 고르고, 마음을 듣고, 눈빛을 살피고, 감정을 조율한”
통역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