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선, 불가항력적인 비극 앞에서

지난주,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어린 생명이 스러졌다. 무력하고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작은 존재가 자신을 보호해야 할 사람의 손에 무자비하게 희생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가슴 깊이 충격을 받았다. 부모의 절망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사건을 듣는 모든 이가 황망하고도 참담한 심정이었다. 교사라는 신분을 가졌음에도, 인간의 최소한의 본능조차 거스르고 어린 생명을 빼앗은 이 가해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 한 사람의 악행으로만 치부하기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 많은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어린이가 전쟁과 굶주림, 질병 속에서 신음하다 생을 마감하고 있다.

소말리아와 예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분쟁 지역에서는 따뜻한 한 끼 식사가 생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을 무너뜨리고, 아이들의 꿈을 산산이 조각내는 절망의 이름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024년 초까지 10만 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가자지구에서는 2023년 하반기 이후 2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그중 상당수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를 통해 이러한 참상을 듣지만, 숫자로 기록된 사망자 통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하루의 뉴스 속보로 소비되고, 새로운 사건이 등장하면 또다시 잊혀질 뿐이다.

그러나 그 숫자 하나하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으며,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이러한 비극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묻는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토록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지 않는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논의다. 고대부터 수많은 종교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내놓으려 했지만, 여전히 명확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기독교 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은 더 큰 선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라 보았지만, 과연 전쟁과 학살, 어린 생명의 죽음이 어떤 더 큰 선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이유로 든다. 신이 인간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기에,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고, 그 결과 악행도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전쟁터에서 부모를 잃고, 단 한 번도 자유를 가져보지 못한 채 굶어 죽는 아이들의 고통을 두고,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다른 해석은 악을 ‘시험’으로 본다. 불행과 고통을 통해 인간이 더 성숙해지고, 신의 뜻을 이해하며,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보일 위험이 크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악의 존재 이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철학자들은 ‘악’이란 단순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선택과 행동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우리는 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며 무력하게 바라볼 수도 있고, 혹은 그 악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즉, 악은 특별한 괴물이나 비정상적인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작은 선택을 통해 악을 묵인하고 정당화하면서 확대된다는 것이다. 전쟁 범죄자들이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변명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뉴스에서 전해지는 수많은 비극을 단순한 숫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침묵하지 않고,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악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일 것이다.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선을 선택하는 것. 그 선이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족을 사랑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잘못된 것에 맞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결국 악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다.

해변을 거닐던 한 사람이 발길을 멈췄다. 거센 파도에 휩쓸려 나온 불가사리들이 모래 위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불가사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다로 던졌다. 그가 한 번 손을 뻗을 때마다 작은 생명이 다시 물속으로 돌아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가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해변에 쌓인 불가사리 수천, 수만 마리 중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는 잠시 손에 쥔 불가사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에 든 불가사리를 다시 바다에 던지며 말했다.

“이 녀석에게는 의미가 있지요.”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무고한 생명들이 폭력과 탐욕 속에서 희생된다. 거대한 악과 불의 앞에서 우리의 힘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인다. 우리가 기울일 수 있는 노력은 너무 미약해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이다.

큰 선행이나 거창한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작은 친절, 작은 용서, 작은 나눔이면 충분하다.

한 사람을 돕는 일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 몰라도, 그 한 사람에게는 전부일 수 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이 있다면, 그것을 주저 없이 실천해야 한다. 마치 해변에서 한 마리의 불가사리를 집어 바다로 던지듯이.

아무리 작은 사랑이라도, 그것을 받은 이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기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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