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자만이,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예수의 삼중 언어가 던지는 현대적 성찰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의 언어부터 생각해보자. 한국어로 쓰여진 이 문장들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문화적 배경, 사회적 위치, 권력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가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람어(민중의 언어), 히브리어(전통과 권위의 언어), 헬라어(제국과 세계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의 언어 선택은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권력, 정체성의 경계를 넘는 실천이었다.

아람어는 당시 일반 민중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언어였다. 시장에서 흥정할 때, 아이들을 달랠 때, 연인과 속삭일 때 사용되던 생활의 언어고 어머니의 기도에 섞여 흐르던 말이었다.  예수는 이 언어로 병든 자에게 손을 내밀고, 억눌린 자의 이름을 불렀다.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 그 말은 신학이 아니라 숨이었다. 살아있다는 증거.

히브리어는 성전과 회당에서 울려 퍼지던 신성한 언어, 율법과 전통이 새겨진 권위의 언어였다.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 제의와 문서의 언어. 그 말은 권위와 질서의 체계를 드러내는 코드였다. 예수는 그 권위의 언어를 인용하면서도 전복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틀 안에서, 그 틀을 뒤흔든다. 전통을 부정하지 않되, 해석의 주체를 재정의한다.

헬라어는 로마 제국의 공용어로서 지중해 전역을 관통하던 세계화의 언어, 권력과 문명의 언어였다. 제국의 언어, 경제와 철학, 군대가 지배한 세계의 공용어. 예수는 직접 많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헬라어로 쓰였다. 세계를 향한 말이 되기 위해선, 세계의 언어를 거쳐야 했다. 문자가 권력이 되는 시대에서, 말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정체성을 담은 영토였다.

예수는 이 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것은 단순한 다중언어 능력이 아니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사회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계층을 넘나들며,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누가 어떤 언어로 말할 수 있는가, 누구의 언어가 ‘표준’으로 인정받는가, 어떤 언어가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는가—이 모든 것이 권력의 문제다.

현대 한국 사회를 보자. 표준어와 방언, 한국어와 외국어, 문어체와 구어체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서울 말이 표준이 되고, 지역 방언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영어는 글로벌 엘리트의 상징이 되고, 다문화 가정의 모국어는 사적 영역으로 밀려난다.

예수의 언어 실천은 이러한 언어 위계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그는 민중의 언어로 하늘나라를 말했고, 전통의 언어로 기존 해석을 뒤집었으며, 제국의 언어로 로마의 논리를 전복시켰다.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 질서의 배타성을 해체한 것이다.

소통은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 관계를 재구성하고, 사회적 경계를 재설정하며,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실천이다.

예수가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며 나눈 대화, 바리새인들과 벌인 논쟁, 제자들에게 건넨 가르침—이 모든 소통은 기존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였다. 그는 ‘누구와 말하는가’를 통해 사회적 경계를 허물었고, ‘어떻게 말하는가’를 통해 권위의 구조를 뒤흔들었다.

현대의 소통 환경을 생각해보자. 소셜미디어는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민주적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과 플랫폼의 논리에 의해 통제된다. 특정한 언어와 표현 방식이 더 많은 가시성을 얻고, 어떤 목소리는 침묵당한다.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polyphony)’의 개념을 빌려보자. 진정한 소통은 단일한 목소리의 독백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대화하고 경합하는 과정이다. 예수의 언어 실천은 바로 이러한 다성성의 구현이었다.

그는 한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상황과 청중에 따라 언어를 바꾸고, 각 언어가 가진 고유한 뉘앙스와 문화적 맥락을 살렸다. 아람어의 친밀함, 히브리어의 권위, 헬라어의 보편성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글로벌화 시대에 영어가 지배적 언어가 되면서, 언어의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하나의 언어로 모든 것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만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다시 라틴어와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번역 과정에서 원래 의미의 일부는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기도 했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적 변환이 아니라, 문화적 해석이고 정치적 선택이다.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번역할 것인가—이 모든 것이 권력과 연결된다.

현대 사회에서 번역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인공지능 번역 기술의 발달로 언어 장벽이 낮아지는 듯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뉘앙스와 맥락이 사라지는 위험도 커졌다. 우리는 기술적 편의성과 문화적 다양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예수는 때로 침묵했다.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 십자가 위에서의 침묵. 이 침묵들은 단순한 무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였다. 침묵 역시 언어의 한 형태이며, 때로는 어떤 말보다 웅변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침묵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침묵은 동의를 의미하는가, 저항을 의미하는가? #MeToo 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오랜 침묵이 깨질 때 사회는 변화한다. 침묵당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할 때, 기존 질서는 흔들린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가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언어적 복잡성에 직면해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텍스트와 이미지, 인간과 AI의 언어가 뒤섞인 환경에서 살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해시태그는 새로운 형태의 공통 언어가 되었고, 이모티콘과 밈은 문화를 초월한 소통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필터 버블과 에코 체임버 현상으로 인해 소통의 분절화도 심화되고 있다.

예수의 언어 실천에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용기, 다양한 층위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 그리고 언어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비전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을까?
일상의 대화가 SNS와 메시지 앱으로 압축되고, 말 대신 이모지가 감정을 대변하는 시대. 정치인의 발언이 스핀되고, 기업의 슬로건은 현실을 미화한다. 우리는 말하고 있지만, 정말 듣고 있는가? 혹은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가?

오늘, 우리는 어떤 언어로 서로를 부르고 있는가.
언어는 차별과 배제의 도구가 될 수도, 연대와 해방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언어와 표현을 존중하는 감수성을 기르자. 소수자의 언어, 주변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언어의 경계를 넘는 실천, 즉 다중언어적 삶을 지향하자. 포용적 언어 사용을 통해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줄이고, 모두의 목소리가 존중받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자.

언어는 단지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다. 구조를 드러내고, 권력을 숨기며, 공동체의 경계를 만든다. 언어의 선택은 중립적이지 않다. 너와 내가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세계에 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언어, 그 너머의 세계

예수의 언어 실천은 단순한 소통 기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실천이었다. 언어를 통해 기존 질서의 경계를 허물고, 배제된 자들을 포용하며,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언어적 상상력이다. 언어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으로 이해하는 것. 소통을 정보 전달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으로 보는 것. 그리고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것.

당신이 오늘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라. 그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었는가, 아니면 서로의 세계를 넓히는 만남이었는가? 당신의 언어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당신은 침묵당한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고른다. 때로는 침묵이 그 언어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질문 하나가, 거대한 사유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당신은 괜찮나요?” 이 단순한 말이 진심일 때, 그것은 저항이자 구원이다.

예수가 보여준 언어의 실천은, 권력에 저항하고, 타자의 경계를 넘는 행위였다.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말하지 말고, 옆에서 옆으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살아있는 언어로.

언어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예수가 2천 년 전 세 개의 언어로 보여준 것처럼.

 

나는 예수가 아람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넘나들며 말을 건넸던 장면을 떠올린다. 민중의 언어로 속삭이고, 전통의 언어로 경전을 읽으며, 제국의 언어로 세계와 맞섰던 그의 입술은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언어는 그 자체로 권력의 경계, 정체성의 울타리, 사회 구조의 틈새를 드나드는 실천이었다.
아람어는 일상의 숨결, 히브리어는 신성의 무게, 헬라어는 세계의 흐름을 품었다. 예수는 이 셋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언어가 곧 삶의 태도임을 보여주었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의 집합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드러내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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