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우리와 같았다. 단지 ‘다르게’ 살았을 뿐이다.”
이 단순한 진실은 시대와 이념, 신념의 경계에서 너무 자주 무시된다. 다름은 죄가 아니다. 다름은 가능성이다. 그것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문명을 자극하고, 사유를 전환시키며,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극단주의는 이 ‘다름’을 견디지 못한다. 극단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라난다.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불안을 파고들어, 단순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속삭인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통찰했듯, “전체주의 운동은 고립된 개인들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혼란스럽고 외로울 때, 극단주의는 소속감과 확신이라는 마약을 내민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기독교와 이슬람,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 이러한 대립 구도 자체는 건강하다. 헤겔이 말한 변증법적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말살하려 할 때 시작된다.
극단주의는 ‘다름’을 이질성으로 낙인찍고, 곧 적대의 대상으로 삼는다. 좌와 우, 기독교와 이슬람,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비건과 육식주의, 청년과 노년… 수많은 이분법은 극단주의자들의 무기창고로 기능한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주장하고 단정짓고, 결국 배제할 뿐이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렇게까지 극렬할까? 극단주의가 자극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의 뇌는 위험 신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 극단주의자들은 이를 교묘하게 활용한다.
“우리가 위험하다”, “그들이 우리를 파괴하려 한다”— 이런 메시지는 아드레날린을 유발하고, 집단의 결속을 강화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경제적 메커니즘이다. 극단주의는 단순하고, 자극적이며, 감정을 흔든다. 무지와 분노, 공포와 불안이 결합될 때, 극단은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그 지지는 ‘돈’이 된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추천하고, 사람들은 더욱 강한 ‘한 편’의 이야기만 소비한다. 분노를 유통하는 경제, 혐오를 판매하는 시장이 조성된다.
이른바 ‘극단의 생태계’다. 정치는 이를 이용하고, 언론은 확대 재생산하며, 기업은 이를 통해 수익을 챙긴다. 극단주의는 단순한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진화한다. 말살과 배제는 이제 ‘콘텐츠’가 되고, 소외된 감정들은 ‘팔리는 상품’이 된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여성과 남성, 신앙과 비신앙 사이에는 대화가 존재할 수 있다. 대화는 때로 오해를 낳고 갈등을 초래하지만, 그 속에서 ‘관계’가 생긴다. 이해하고, 설득하며, 때로는 설득당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차이야말로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다. 생물학적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성을 지키듯,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은 인간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한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획일화되지 않는다. 반면 소인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진정한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페미니즘과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건전하게 대화할 때, 성평등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생긴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한계를 지적할 때, 더 나은 정책이 가능해진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대화할 때, 종교 간 평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극단주의는 대화 자체를 제거한다. 다름을 말살하고, 오직 ‘우리 편’만을 남긴다. 그것이 독재의 언어이고, 폭력의 출발점이다. 히틀러, 이슬람국가(IS), 광신적 정치세력, 포퓰리스트 지도자들까지—극단은 늘 같은 방식을 따른다. 단순하고, 선동적이며, ‘다름’을 악마화한다.
그러니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신념과 감정이 진짜 ‘생각의 결과’인지, 아니면 ‘극단의 유혹’에 빠진 감정의 산물인지. 나는 지금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가, 아니면 공격하고 싶은가?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기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있다.
- 이분법에서 벗어나자. 세상은 흑백이 아니다. 우리는 회색의 스펙트럼 안에 살고 있다.
- 불편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용기, 그것이 민주주의다. 칸트가 말한 “용기를 내어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라”는 계몽의 정신을 기억하자.
- 자극적 콘텐츠에 반응하지 말자. 클릭 하나가 혐오를 키운다.
- 단어를 조심하자. ‘틀렸다’는 말보다, ‘다르다’는 말이 먼저다.
- 진짜 논쟁을 하자.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주장을 비판하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대화할 때, 설득하려 하지 말고 이해하려 노력하라. 칼 로저스의 공감적 경청법을 배우고 실천하자.
- 알고리즘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당신이 소비하는 정보를 의식적으로 다양화하라. 극단적 콘텐츠가 주는 자극적 쾌감을 경계하고, 균형 잡힌 정보 diet를 유지하자.
차이를 축복으로 만드는 용기
“진정한 용기는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극단주의가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공존이다. 우리의 무기는 증오가 아닌, 대화여야 한다.
극단주의자들은 차이를 위협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차이를 축복으로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생각, 다른 문화, 다른 경험들이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해왔다.
당신이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 그것을 적대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받아들여보라. 당신이 확신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때, 그것을 공격으로 여기지 말고, 성찰의 계기로 삼아보라.
극단주의는 단순함을 약속하지만, 결국 우리를 더 복잡한 갈등으로 이끈다. 반면,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태도는 처음엔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더 평화롭고 창조적인 세상을 만든다.
릴케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모든 용(dragon)은 실은 공주(princess)이며, 우리가 아름답고 용감한 모습을 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겉으로 보이는 모습(용)과 본질(공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이 은유는 우리의 편견과 단정이 얼마나 쉽게 진실을 가릴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상대를 단순히 ‘적’으로 규정하고, 그 안에 숨겨진 가능성이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것 속에서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긍정적 가치가 존재하며, 우리가 적이라고 단정짓는 사람이나 대상도 사실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긍정적인 면, 아름다운 면, 용감함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차이를 두려워하지 말라. 차이를 말살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당신의 확신이 오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찰하라. 그것이 극단주의에 맞서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극단주의 자가진단을 위한 60가지 질문
당신은 혹시 극단주의자일까? 이 질문이 불쾌하다면, 이미 첫 번째 신호등이 켜진 것일지도 모른다. 극단주의는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교 레비츠키와 지블랫 교수가 제시한 ‘독재자 감별법’1과 한국의 뉴스 회피 현상2, 그리고 확증 편향에 대한 연구3를 토대로, 우리가 극단주의의 늪에 빠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정치적 태도 영역
1. 민주주의 룰 거부
□ 선거 결과에 불복하거나 “조작됐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 헌법이나 법원의 판결을 “잘못됐다”며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국회나 의회 같은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2. 적대적 프레이밍
□ 정치적 반대편을 “매국노”, “종북”, “토착왜구” 등으로 규정한다
□ 상대방을 외국 세력과 연결된 스파이로 의심한다
□ “그들은 나라를 망치려 한다”는 식의 음모론을 믿는다
3. 폭력 용인도
□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상대편에 대한 물리적 공격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 “때로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며 폭력을 미화한다
정보 소비 패턴
4. 정보 편식도
□ 내 정치적 성향과 반대되는 뉴스는 아예 보지 않는다
□ 특정 언론사나 채널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 “저쪽 언론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단정한다
5. 확증 편향 심화
□ 내 생각과 다른 정보는 “가짜뉴스”로 치부한다
□ 반박 증거가 나와도 기존 믿음을 바꾸지 않는다
□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만 찾아 듣는다
6. 복잡성 거부
□ 사회 문제에 대한 단순하고 극단적인 해법을 선호한다
□ “모 아니면 도”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한다
□ 중간 지대나 타협을 “배신”으로 여긴다
타인과의 관계
7. 관계 단절
□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나 가족과 관계를 끊었다
□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아예 거부한다
□ “네가 ○○을 지지하면 우리는 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8. 집단 사고
□ 우리 편의 잘못은 보지 않고 상대편의 잘못만 크게 본다
□ 같은 성향의 사람들로만 둘러싸여 지낸다
□ 집단 내 비판적 의견을 “배신”으로 여긴다
9. 공감 능력 상실
□ 상대편 사람들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무감각하다
□ “그들이 당하는 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사고 방식과 행동
10. 절대주의
□ 내가 믿는 가치나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 다른 관점이나 해석의 여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사고에 갇혀 있다
11. 희생자 의식
□ 우리 집단이 항상 피해를 당한다고 느낀다
□ 상대방의 성공을 우리의 박탈로 여긴다
□ “우리만 손해 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12. 미래 절망감
□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파국적 사고를 한다
□ 점진적 개선보다는 급진적 변화만이 답이라고 본다
□ 현재 체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한다
언어와 표현
13. 혐오 표현
□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 특정 집단을 통째로 매도하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쓴다
□ 온라인에서 익명성을 이용해 공격적 댓글을 단다
14. 선동적 언어
□ “전쟁”, “투쟁”, “섬멸” 같은 극단적 언어를 즐겨 쓴다
□ 상황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표현한다
□ 감정적 자극을 위한 선동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15. 자유권 억압 지지
□ 상대편의 언론 자유나 집회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위험한 사상”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검열이나 탄압을 “정당한 조치”로 여긴다
개인적 성향
16. 자기성찰 부족
□ 내가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 자신의 편견이나 한계를 돌아보지 않는다
□ 비판을 받으면 내용보다는 상대방을 공격한다
17. 권위주의 성향
□ 강력한 리더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복잡한 민주적 절차보다는 신속한 권력 행사를 선호한다
□ 다수의 의견보다는 “올바른” 소수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본다
18. 경제적 동기
□ 극단적 주장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 후원금이나 광고료 때문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든다
□ 온건한 입장보다 극단적 입장이 더 “장사”가 된다는 것을 안다
행동 패턴
19. 행동의 일관성
□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일하게 극단적 행동을 한다
□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실제로 극단적 행위를 저지른다
□ 극단적 집단의 활동에 직접 참여한다
20. 변화 거부
□ 새로운 정보나 경험에도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 토론이나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를 거부한다
□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집한다
점수와 성찰
채점표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점수가 아니라 이런 성찰 자체다.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지”를 말했듯이, 자신이 극단주의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극단주의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극단주의는 확신의 병이다. 너무 확신하면 사유가 멈춘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의심은 불쾌하지만, 확신은 우스꽝스럽다”고 했다. 당신의 확신이 혹시 우스꽝스러운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는지, 거울 앞에서 정직하게 물어보라.
극단주의는 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이다. 반대 성향 뉴스 회피, 희생자 의식, 혐오 표현, 자기성찰 부족 등이 극단주의의 주요 징후다. 중요한 것은 점수가 아니라 자신이 극단주의자일 가능성을 인정하는 성찰 자체다. 극단주의는 확신의 병이며, 과도한 확신이 사유를 멈추게 한다는 볼테르의 통찰을 기억해야 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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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brian@hyuncheong.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