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이름의 게임에 태어난 아이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오징어게임

운명이라는 이름의 게임에 태어난 아이<span style='font-size:18px; display: block; margin-top:7px; margin-bottom:20px;'>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오징어게임</span>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 질문은 삶의 첫 장이 아니라, 책장을 한참 넘기다 문득 마주하는 낯선 문장과 같다. 우리는 태어남의 이유를 묻기 전에, 이미 존재라는 무대 위에 서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참가 의사를 묻지 않았고, 시나리오를 미리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 실존적 당혹감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 3>의 한 장면에서 가장 잔혹하고 선명하게 폭발했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필사적인 비명이 뒤섞인 절망의 공간. 참가자들의 초록색 운동복 위로 선혈이 튀는 잔혹한 게임의 한복판에서, 가느다란 생명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동의한 적 없다. 게임의 규칙을 알지도 못하고, 참가 서류에 지장을 찍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떴을 뿐인데, 이미 거대한 생존 게임의 가장 연약한 참가자가 되어버렸다. 아이의 운명은 전적으로 ‘어른’이라 불리는 절대자들의 손에, 그들의 변덕과 이기심, 혹은 아주 희미한 양심에 달려있다.

아이가 게임 중간에 태어나는 장면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잔혹하고도 적나라하게 압축한다. 아이는 원하지도 않았고, 선택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상황조차 인지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그는 생존을 놓고 싸워야 하는 세계 한가운데에 내던져진다. 자신을 이 세계로 들여보낸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상황은 무정하다. 아이의 존재는 그저 또 하나의 변수가 되어버린다.

이 장면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피투된 존재”라 했다. 우리는 ‘던져진 존재(geworfener Entwurf)’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우리를 이곳에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시간 속에 내던져진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 던짐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원죄로부터 이어진 고난의 연속이다.

이 장면이 섬뜩할 만큼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징어 게임 속 아이의 처지는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적, 인종, 계급, 성별이라는, 결코 선택한 적 없는 사회적 좌표 위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보이지 않는 게임의 규칙, 즉 자본주의의 논리, 사회적 통념, 국가의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참가자가 된다. 아이가 프론트맨의 규칙을 따라야 하듯, 우리는 이 구조가 정한 성공과 실패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압박받는다.

이 운명적 부조리 앞에서 종교와 철학은 오랜 시간 답을 찾아 헤맸다. 불교에서는 생 자체를 ‘고(苦)’라 한다. 우리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실려 이생에 도착하고, 이유도 모른 채 번뇌의 바다를 헤엄친다.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인간은 타락한 세계에 태어난 죄인이며, 동시에 구원의 약속과 하나님의 섭리 아래 놓인 존재다. 이처럼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삶을 숙명적인 굴레로부터 출발시킨다.
어떤 이들은 ‘예정설’을 말한다. 장 칼뱅의 주장처럼, 구원받을 자와 벌받을 자는 태초부터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이미 짜인 각본을 연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력과 자유의지는 신의 거대한 계획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세계관인가. 구조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처럼, 우리는 가족, 학교, 종교를 통해 시스템의 규칙을 내면화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순종적인 참가자로 길러진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감시탑 아래에서 움직이는 죄수와 같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가피한 존재의 조건 속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태어남은 나의 결정이 아니었지만, 살아감은 나의 결정이 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시지프를 향해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는 부조리하지만, 그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노동을 의식하는 순간, 시지프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선택 불가능의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인간만이 가진 실존의 존엄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우리는 게임 한가운데에서 눈을 뜨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를 무력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질문은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조건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힘, 그것이 믿음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했다. 인간은 어떤 정해진 목적이나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만들어가야 할 책임, 즉 ‘자유라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오징어 게임 속 아이에게는 정해진 ‘본질’이 없다. 그 아이가 희생자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 될지는, 그를 둘러싼 다른 참가자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 가능성을 ‘탄생성(Natal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녀에게 탄생은 단순히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전례 없던 ‘새로운 시작’이 들어오는 기적이다. 모든 탄생은 예측 불가능한 잠재력을 품고 있으며, 기존의 질서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게임 설계자들은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하지만, ‘탄생’이라는 가장 예측 불가능한 사건 앞에서는 그들의 계획도 흔들릴 수 있다. 아이의 존재 자체가 게임의 규칙을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변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역할이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운명의 게임에 던져진 참가자이면서, 동시에 곁에 있는 다른 참가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어른’이다. 우리는 시스템이 강요하는 생존 논리에 따라 서로를 밟고 일어설 수도 있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갓 태어난 아이를 함께 보호하는 연대를 선택할 수도 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이 게임의 규칙이라면, 그 규칙을 거부하고 가장 연약한 존재를 위해 손을 내미는 행위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저항이자 가장 위대한 선택이다.

우리의 삶은 정해진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끊임없는 길항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사회 구조라는 거대한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어떤 자세로 걷고 누구의 손을 잡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 속 아이의 운명이 어른들의 선택에 달렸듯, 우리 사회의 미래는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지금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태어나는 것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것이 이 부조리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지닌 유일한 희망이자 가장 무거운 책임이다.

희망은 믿음의 타오름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세상이 나에게 말하길 “너는 선택받지 않았고, 네 삶은 의미가 없다”고 할 때, 종교는 조용히 말한다. “너는 선택되었고, 네 삶은 거룩하다.” 기독교에서 ‘은총’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구원의 손길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깨달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 통찰의 가능성이다. 이 둘은 모두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세계 안에서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아이처럼 시작된 우리 삶은, 이제 어른으로서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의 과제로 남는다. 그것이 운명을 넘는 실존의 시작이다. 무력해 보이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우리는 이미 이 세계의 규칙 바깥에 선 존재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회의는 결국 “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로 확장된다. 절대자의 게임에서 태어난 아이도, 이 게임을 사랑과 연대로 다시 그릴 수 있다. 당신이 오늘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쩌면 삶이란, 정해진 패배 속에서 기어이 ‘사랑’이라는 승리를 만들어내는, 가장 위대한 게임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잔혹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선택권 없이 태어나 사회 구조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과 닮았다. 예정설이나 구조주의는 이 같은 운명적 한계를 강조하지만, 실존주의는 정해진 본질 없이 스스로 삶을 만들어가는 자유와 책임을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개념처럼, 새로운 생명은 기존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희망이다. 결국 우리는 운명에 순응할 수도, 연대를 통해 저항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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