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을 할지를 결정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무수한 가능성 앞에 선다. 그러나 이 선택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사람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의미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이 구분이야말로 삶의 지속가능성과 내적 안정성을 결정하는 핵심적 갈림길이다.
절망의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의미의 힘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진짜 이유를 발견했다. 그것은 건강이나 나이, 혹은 운이 아니라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였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기록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의 핵심은 의미가 구원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견디게 하는 내적 추진력이라는 점이다. 프랭클에게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위로나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는 실존적 의지, 즉 삶을 관통하는 지속적 동력이었다.
이러한 의미 추구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정보 과잉과 선택의 피로감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사람들은 종종 무의미함에 빠진다. 프랭클의 통찰에 따르면, 의미 없는 삶은 실존적 공허를 낳고, 이는 현대적 신경증의 주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의미를 기준으로 한 삶의 좌표 설정은 단순한 철학적 선택이 아니라 정신건강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실천적 과제다.
헤세의 알 깨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등장하는 명제는 의미를 좇는 삶의 필연적 과정을 상징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 문장은 개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안전지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실존적 진실을 담고 있다.
알 깨기는 의미 추구의 불가피한 과정이다. 부모나 사회가 제공한 가치체계, 타인의 기대와 인정에 의존했던 삶의 틀을 벗어나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수적이다. 헤세가 묘사한 싱클레어의 여정은 단순한 성장 소설이 아니라, 의미를 기준으로 한 삶의 재구성 과정을 그린 실존적 안내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알 깨기’는 더욱 복잡하다. 소셜미디어와 무한한 정보 접근은 타인과의 비교를 일상화하고, 외부 인정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킨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의미를 중심에 둔 내적 기준의 확립이 더욱 절실해진다. 헤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려면 낡은 세계의 안전함을 포기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캠벨의 황홀함
조지프 캠벨의 “Follow your bliss(당신의 황홀함을 따르라)”는 단순한 행복 추구가 아니다. 여기서 ‘블리스(bliss)’는 순간적 쾌감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삶을 꿰뚫는 깊은 기쁨을 의미한다. 캠벨에게 블리스는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희열감”이다.
캠벨이 연구한 영웅들의 공통점은 욕망이 아니라 소명(vocation)을 따라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전리품이 아니라 귀향의 기쁨을, 길가메시는 불멸보다 존재의 의미를 추구했다. 이들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의미의 깊이였다.
블리스가 선명할수록 타인의 인정은 옵션이 된다. 내적 기준이 확고할 때 외부의 거절이나 오해는 여정의 부수적 사건일 뿐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이는 의미 중심적 삶이 갖는 근본적 자유를 보여준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깊은 기쁨을 신뢰할 수 있는 힘 말이다.
사람 vs 의미
사람을 기준으로 한 삶의 한계는 명확하다.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행동 패턴을 모방하고, 그들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우상은 변덕스럽고, 관계는 예측 불가능하다. 한 사람에게 모든 좌표를 맡기는 순간, 그 사람이 사라지거나 변할 때 전체 삶의 구조가 흔들린다.
반면 의미를 기준으로 한 관계 형성은 전혀 다른 질서를 만든다. 내가 무엇을 위해 걷는가가 명확하면, 함께 걷는 동료는 자연히 걸러지고 또 모인다. 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 간의 연결은 상황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깊은 유대를 형성한다.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 연구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관계의 핵심은 상호 존중과 가치관의 공유다. MZ세대의 97.4%가 ‘인간관계가 힘들다’고 답한 조사 결과는 사람 중심적 관계 맺기의 한계를 보여준다. 반면 가치와 의미를 공유하는 관계는 더 깊고 안정적인 연결을 만들어낸다.
의미를 좇는 삶의 실천적 방법
의미 중심적 삶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을 제안한다.
첫째, 가치 명시하자. 한 줄로 자신의 미션을 써 붙이는 것이다. 이는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즉각 판별할 수 있게 해준다. 프랭클이 수용소에서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았듯, 명확한 가치 기준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길잡이 역할을 한다.
둘째, 관계 점검이다. 현재의 인간관계가 내 의미를 지지하는가, 소모시키는가를 주기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냉정한 계산이 아니라 서로의 성장을 위한 건강한 경계 설정이다.
셋째, 작은 실천이다. 의미가 너무 거대하면 행동이 막힌다. 하루 10분, 한 문장, 한 통의 전화 같은 작고 반복 가능한 단위로 의미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캠벨이 말한 영웅의 여정도 작은 부름(Call)에서 시작된다.
북극성을 잃지 않는 항해
사람과 인연이 떠나면 공허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가 남아 있다면 공허는 곧 여백이 되고, 그 여백을 메꿀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다. 북극성을 잃지 않는 항해사가 항구를 잃지 않듯, 의미를 좇는 이에게는 결국 맞닿을 사람이 생긴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의미 추구는 자연스럽게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깊은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헤세의 표현처럼 “깨어진 껍데기에서 피어오르는 냄새가 동류를 부른다”.
현대 사회에서 의미 중심적 삶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불확실성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외부 기준에 의존한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반면 내적 의미를 기준으로 한 삶은 변화하는 환경에서도 일관성과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의미라는 나침반, 삶이라는 항해
프랭클의 내적 추진력, 헤세의 알 깨기, 캠벨의 황홀함은 결국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의미를 기준으로 한 삶만이 진정으로 지속가능하고 충만한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변하고, 상황은 흔들리지만, 깊이 뿌리내린 의미는 폭풍 속에서도 우리를 지탱하는 닻이 된다.
“내가 무엇을 위해 걷는가”—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진 사람에게는 함께 걸을 동료가 자연히 모인다. 그들과의 관계는 일시적 필요나 이해관계를 넘어선, 깊고 지속가능한 연결이 된다.
의미를 좇는 삶은 쉽지 않다. 기존의 안전지대를 포기하고, 낯선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북극성을 잃지 않는 항해사처럼, 의미라는 나침반을 가진 사람은 어떤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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