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하늘에서 땅으로 무게추를 옮긴 사건이었다.
중세의 인간은 신이 만든 세계를 ‘믿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의 인간은 그 세계를 ‘읽는 법’을 배웠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갈릴레오의 망원경,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스케치 속에는 신의 설계도보다 더 집요한 인간의 호기심이 숨 쉬었다. 하늘의 질서가 아니라, 눈과 손, 계산과 기록이 세계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성이란 단어가 처음 ‘세계의 언어’가 된 것도 그때였다. 계몽주의는 그 언어를 정치와 사회의 문법으로 끌어올렸다. 왕과 성직자의 권위 대신, 민중이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이성은 새로운 질서의 토대였다. 그러나 이성의 승리가 곧 평화의 승리는 아니었다.
20세기 초, 이성의 자리를 빼앗은 건 감정과 집단 본능이었다. 대공황과 전쟁의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합리적 토론보다 ‘확신하는 지도자’를 택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그렇게 등장했다. 군중은 한 번 흥분하면 이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군화발 아래서 이성은 꺾였고, 광장은 구호로만 메워졌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그 장면은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린다. 데이터와 분석보다 ‘내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 힘을 얻는다. 정치와 언론, SNS는 복잡한 맥락 대신 자극적인 단문과 밈(meme)을 판다. ‘민생’은 정책보다 감정 게임이 되었고, 논쟁은 사실 검증이 아니라 ‘내 편-네 편’ 구도로 귀결된다.
여기에 포스트모던의 해체가 겹친다.
절대적 진리, 보편 가치, ‘모두에게 통하는 이야기’는 무너졌다. 진리는 수많은 해석의 조각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다양성은 존중받았지만 공통 기반은 붕괴됐다. 사회는 더 이상 하나의 무대가 아니라, 서로 소리를 주고받지 않는 수백 개의 소극장이 되었다. 각자의 대사는 각자의 무대에서만 울린다.
한국사회는 이 격랑을 압축해서 겪었다.
근대화는 서구보다 수백 년 늦게 시작했지만, 이성의 확립, 민주주의 도입, 산업화, 민주화, 포스트모던적 해체까지를 단 한 세기에 몰아넣었다. 압축성장은 효율이 아니라 불균형을 남겼다. 진보와 보수,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수도권과 지방이 서로 다른 현실을 살며, 다른 언어로 말한다. 정치판은 이 간극을 메우기보다 넓히는 데 골몰한다.
이 결과, 오늘의 한국사회는 이중적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기술·민주제도를 갖췄지만, 공론장의 수준은 놀라울 만큼 감정적이고 단편적이다. 데이터보다 짧은 영상, 정책보다 표정, 분석보다 ‘내 편’이 우선이다. 이것은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니라, 이성과 해체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문명적 위치다.
그렇다면 해법은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다.
이미 그 집은 허물어졌다. 필요한 것은 이성과 감정, 다양성과 공통성 사이의 새로운 균형이다. 차이를 인정하되, 최소한의 합의와 사실의 토대를 다시 세워야 한다. 민주주의는 그 위에서만 유지된다.
당신은 지금, 어느 무대에서 어떤 대사를 외치고 있는가?
그 대사가 다른 무대까지 닿을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이미 각자의 방음벽 속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걸까?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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