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나로군”

한 농부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밭의 소출이 30배, 60배, 100배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였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응답하셨고 농부는 열심히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를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농부의 수확은 해마다 늘어났고 생활은 윤택해졌다. 하지만 아직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농부가 부자가 됐다고 이야기 했고 농부도 어느덧 자기가 부자가 된 줄로 착각했다.

농부는 드디어 부자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세단승용차에 외제 골프채를 싣고 다니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농부의 밭에는 민들레가 자라기 시작했다. 한두 개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농부는 가진 돈을 다 날렸고 밭은 민들레가 가득하게 됐다.
집안에는 잔고가 없는 빈 통장과 온갖 청구서뿐이었다. 그제야 농부는 자신이 결코 부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농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봤다. 거울 속의 모습은 농부의 모습이 아닌 낯선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고급시계와 무스탕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제야 나로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농부가 가난뱅이가 됐다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농부는 예전처럼 밭에 나가 민들레를 하나씩 뽑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난 부자도 아니고 가난뱅이도 아니요. 그저 농부일 따름이지요.”

언제부턴가 우리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기독교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건축, 그들의 설교, 그들의 음악, 그들의 문화가 최선의 것인양 따라가기 바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의 기관과 교회들은 성장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들을 기록하기도 했다.

우리는 교세의 확장이나 기관의 성장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현재 교회와 신자들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재정의 대부분이 인건비로 투자되는 교회나 기관이 어떻게 지상명령을 위임받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선교의 재정은 줄어드는데 교역자들의 복지에 필요한 예산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선교의 사명 앞에 서 보자. 말씀 앞에 서 보자.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인지,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인지, 그리고 말할 수 있나 보자. “이제야 나로군” “이제야 그리스도인이로군”이라고.

 

-김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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