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결단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교회는 단지 개인의 믿음을 돕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집단행동을 유도하고, 정체성과 감정을 조직화하는 종교적 구조물이다.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한다. 그런데 교회라는 구조는 매우 특수한 유형의 공동체다.
그곳에선 회의가 곧 ‘의심’이고, 질문은 ‘불순종’이며, 다름은 ‘배교’가 된다.
믿음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에 가깝다. 이를테면, “성경은 틀릴 수 없다”는 전제는 논증이 아니라 선언이다. 이때, 교회가 제공하는 믿음은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 목사님의 가르침’이 된다. 그리고 그 교리적 울타리는 스스로를 비판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구조 안에서 사람은 점차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타인의 권위를 신의 뜻으로 착각하며, 자신이 보고 듣는 세계보다 교회가 말하는 세계를 우선시한다.
인지 부조화와 맹신의 회로 — 의심은 지옥, 순종은 천국
여기서 작동하는 강력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바로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다.
처음에는 “이건 좀 이상한데?”라는 불편한 감정이 일지만, 이미 헌금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찬양을 함께 부르며 ‘신자’라는 정체성을 내면화한 상태에서는 그런 불일치를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자기 감각을 믿고 공동체로부터 이탈하거나, 자신의 불편한 직관을 거세하고 공동체에 순응하거나.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배제는 지옥이고, 소속은 천국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상한 말’들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코로나는 신의 심판이다.”
“이 대통령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다.”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그 말들이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그 말들을 믿는 공동체 안에 있어야 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가 아니라 권력이다 — 설교는 정치, 복음은 통제
설교는 원래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수많은 교회에서, 설교는 정치 선전과 권위 강화를 위한 도구가 된다.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성경에 있지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다.”는 말은, 성경이 아닌 목사의 입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그 말은 곧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신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는 게 진짜입니다.”
“다른 데는 다 타락했습니다.”
이 모든 말은 은혜라는 이름의 포장을 입은 영적 권력 장악의 명령어다. 그리고 어느새, 복음은 해방이 아니라 통제가 되고, 말씀은 자유가 아니라 조종이 된다. 그 권력의 중독은 강하다.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권력은 신의 이름을 빌려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 질문하는 자는 광야로 쫓겨난다
진짜 신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정말 그런가?” “이건 무슨 뜻인가?” “나는 왜 믿는가?”
그러나 교회는 대체로 질문을 싫어한다. 아니, 두려워한다. 질문은 균열의 시작이고, 균열은 공동체의 해체를 예고한다.
그래서 질문은 금기이며, 묻는 자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가 된다.
이때부터 신앙은 사유가 아니라 암송이 된다.
생각은 교리로 대체되고,
상상은 간증으로 덮이고,
이성은 ‘주의 종’의 해석에 복속된다.
결국, 교회는 믿는 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자만을 남긴다.
그러니 멀쩡했던 사람도 생각을 멈추고, 맹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은 느리지만 치명적이다.
한 번 구조에 사로잡히면, 거기서 나오는 데는 ‘신앙’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믿음은 복종이 아니다.
신앙은 사유 없는 맹신이 아니다.
예수는 철저히 구조 바깥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성전의 구조를 무너뜨렸고, 기득권 종교인들의 교리를 전복시켰으며, 권위 대신 사랑과 고통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현실은, 정반대로 간다.
복음은 계급의 언어가 되었고, 권위는 계시를 가장하며 폭력적으로 행사되며, 질문은 이단으로 처형되고 있다.
이 글은 교회를 떠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묻고 싶다.
당신은 진짜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 믿음은 당신 안에서, 질문과 눈물과 삶을 거쳐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권위와 구조 속에서 받아쓴 교리인가?
우리가 진짜 회복해야 할 것은 ‘종교적 생활’이 아니라, 사유하는 신앙, 사랑하는 실천, 거룩한 불편함이다.
믿는다는 것은 생각을 멈추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질문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연대하며, 나 아닌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힘이다.
종교는 그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만약 그 신앙이 당신의 사유를 빼앗고, 당신의 이웃을 멀어지게 하고, 당신의 감각을 거세하고 있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무너져야 한다.

블루에이지 회장;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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