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언제부터 기록이 되었을까.
사람들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던 소문 대신,
무언가를 남기기 시작한 순간—
그때부터 세계는 말로만 존재하던 것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가 되었다.
기원전 3200년경, 수메르.
사막 바람이 뜨겁게 휘감던 그 땅의 사람들은
점토판 위에 쐐기 모양의 문자를 눌러 새겼다.
설형문자.
그 시작은 단순했다.
“보리 6포대”, “소 3마리”, “세금 납부 완료.”
그 문장은 문장이 아니라
증거였고,
기억의 구속력이었으며,
신뢰의 서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확장되었다.
왕의 이름이 기록되고, 신의 명령이 적히고,
이야기가 등장했다.
『길가메시 서사시』—그 한 줄의 문장은
문자가 단지 기억의 도구가 아니라
상상의 확장 장치임을 보여주었다.
인더스의 사람들도
도장처럼 생긴 인장을 찍어냈다.
작고 단단한 그 인장에는
동물, 기호, 추상문자 같은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 해독되지 않은 그 언어는
오히려 더욱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인장은 일종의
브랜드이자 서명이며, 신뢰의 징표였다.
오늘날 기업 로고, 패키지, 인증 마크, QR코드는
그 인장의 먼 후손들이 아닐까?
중국의 갑골문은
신의 뜻을 묻는 문자였다.
거북 등껍질에 그어진 그 조형은
예언과 정치, 신탁과 통치의 교차점이었다.
문자는 세계를 설명했을 뿐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문자를
그저 ‘의사소통의 수단’이라 할 수 없다.
문자는 기억의 형식이며,
권력의 장치이며,
세계관의 틀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타자한다.
터치한다.
입력한다.
그러나 그 행위의 뿌리는,
사실상 5천 년 전 점토판 위를 누르던 손가락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데이터를 쌓고,
비밀번호로 자신을 정의하며,
해시태그로 자신의 좌표를 공유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문자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기록은 편리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록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의 윤리’다.
문명이란, 결국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지금 우리가 남기고 있는 이 데이터들은
과연
어떤 문명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

블루에이지 회장 · 콘텐츠 기획자 · 브랜드 마스터 · 오지여행가 · 국제구호개발 활동가
E-mail: brian@hyunche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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