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성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위급한 수술을 앞둔 딸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는 말을 꺼냈다.
그의 머리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은, 그 순간 신의 이름을 불렀다.
종교는 정말 끝났는가?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가 바뀌었는가라는 물음이다.
종교는 무엇의 이름이었는가?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에서 종교를 “개인이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실재와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교리도, 제도도 없다.
그는 종교를 체험의 차원에서 본 최초의 철학자 중 하나였다.
제임스에게 종교란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 실존을 견디기 위한 형식이었다.
폴 틸리히는 종교를 “궁극적 관심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에게 신은 ‘존재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근거였다.
신은 대상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 상실을 견디게 하는 깊이였다.
그의 사유는 종교의 형식을 해체하면서도, 초월의 구조는 인간 내면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정한다.
종교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로 여긴다.
신을 부정하지 않아도, 굳이 교회를 다닐 필요는 없다.
기도하지 않아도, 윤리적일 수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모호해도, 지금 이 생이 의미 없지는 않다.
우리는 점차 신을 믿지 않아도 괜찮은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신의 이름 대신 ‘가치’, ‘의미’, ‘연결’, ‘자기충족’, ‘내면의 평화’ 같은 단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윤리학은 신학을 대체하고, 심리학은 죄의식을 분석하며, 자기계발은 구원의 약속을 대신한다.
이것은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종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종교 아닌 방식의 종교화’가 확산된 것일 뿐이다.
종교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독일 철학은 일찍이 이 해체를 예고했다.
헤겔은 종교를 ‘정신의 감각적 표현’으로 보았고,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 소망의 투사’라 했으며,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
이 흐름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중심이 되는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다.
종교는 더 이상 절대자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상징 구조이며,
사회적·심리적 필요를 해결하는 기제로 이해된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한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고,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다면, 종교의 시대는 정말 끝났는가?
이 질문은 언뜻 명확해 보인다.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교회는 비어간다.
전통적 신앙의 권위는 무너졌고, 과학과 기술이 삶의 대부분을 대체한다.
하지만 정작 인간의 궁극적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고통은 무슨 의미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질문이 남아 있는 한, 종교는 그 구조만을 달리하며 계속 반복될 것이다.
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의 얼굴이 바뀐 것이다.
과거의 신은 산 위에 있었다.
이제의 신은 내면에 있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예술이고, 어떤 이에게는 자연이며,
어떤 이에게는 ‘침묵할 줄 아는 자신’이다.
‘신 없는 종교’ 시대를 사는 우리
종교의 시대는, 형식으로는 끝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절대적 의미를 필요로 하고,
상실을 이겨낼 문장을 원하며,
삶을 지탱할 구조를 찾아 헤맨다.
그 구조의 이름이 이제는 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구조를 향한 갈망은 여전히 종교적이다.
신은 죽었지만, 초월을 향한 갈망은 여전히 살아 있다.
종교는 끝났지만, 믿음은 여전히 새로운 형식을 입고 우리 곁에 있다.
종교의 시대는 끝났을지 몰라도, 인간은 여전히 ‘신 없는 종교’를 만든다.
믿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대상과 형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는 신을 버렸지만, 의미를 향한 갈망은 버리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