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 아니라 경계다죄 없는 거절

“아니요”라는 세 음절은 놀랄 만큼 가볍다. 그러나 그 말을 끝내 뱉지 못해 무거운 침묵을 끌어안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타인의 부탁을 응하지 않으면 차가운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은 미안함으로 포장된 자기 비하다.

『성경』에서 예수는 물 위를 걷고 병자를 고치지만, 모든 청을 수락하지는 않는다. 기적을 보여 달라는 헤롯의 요구에 그는 침묵으로 답한다. 거절은 비인격적 행동이 아니라 자신과 사명의 경계를 지키는 행위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거절을 못 한다는 것은, 곧 책임을 분배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네가 해줄 수 있잖아”라는 말 뒤에는 “네 시간을 내 시간으로 쓰겠다”는 무의식적 선포가 숨어 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삶의 중심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옮겨간다. 그러니 “아니요”는 죄책감을 일으키는 단어가 아니라, 삶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안전핀이다.

거절에도 품격이 있다. 첫째, 명확하게. “다음엔 도울게” 같은 모호한 대기표는 상대의 기대를 연장한다. 둘째, 간결하게. 과도한 변명은 거절을 변질시킨다. 셋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짧게 건네라. 거절과 도움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누군가의 부탁을 단호히 끊어냈을 때 밀려오는 죄책감은 사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만든 그림자다. 타인의 평가보다 스스로의 기준을 먼저 세우라. 내 시간을 존중하는 사람이야말로 남의 시간도 귀하게 여긴다.

오늘 당신은 몇 번의 “네”로 자신을 잃었는가. 그리고 몇 번의 “아니요”로 스스로를 지켰는가. 거절은 관계를 끊지 않는다. 오히려 경계가 선명할 때 관계는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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