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死後)_서론] 로고스, 말의 힘으로 존재를 빚다존재의 설계자, 언어의 창조자,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짓는 힘에 관하여

[사후(死後)_서론] 로고스, 말의 힘으로 존재를 빚다<span style='font-size:22px;display: block; margin-top: 14px;'>존재의 설계자, 언어의 창조자,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짓는 힘에 관하여</span>

들어가며

“사후 세계가 개인의 믿음과 상상에 따라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주제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단지 종교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주장으로만 취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존재론(ontology), 의식철학(philosophy of consciousness), 형이상학(metaphysics), 그리고 관념론(idealism)의 틀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지하게 탐구되어 온 사유의 대상이었다.

스피노자, 버클리, 칸트, 헬더린, 흄, 쇼펜하우어, 화이트헤드, 프로이트와 융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적 철학자들, 그리고 현대의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과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가들은 ‘죽음 이후’와 ‘의식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의식·실재·초월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논의를 전개하여 왔다. 특히 관념론, 과정철학, 현상학 계열에서 이와 관련된 통찰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믿음에 따라 사후 세계가 형성된다는 관점은 엄밀히 말해 현대 존재론적 철학보다는 종교철학 혹은 심리학적 사유에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다. 본문에서 다루게 될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주관적 믿음’을 중심에 놓고 체계를 구축한 이들이 아니라, ‘보편적 실재’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기에, 본 연재가 제시하는 관점과는 다소간의 철학적 거리감이 존재한다. 이 글을 집필하는 필자 또한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거나, 하나의 절대적 진리로 신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총 12회로 구성된 이 철학적 여정은, 기독교의 정수와 헬레니즘 철학, 그리고 현대 존재론을 하나의 사유 맥락 안에서 연결하려는 시도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무형의 주제를 매개로 하여, 존재와 의식, 신념과 언어, 그리고 ‘말의 힘’이라는 실존적 도구들이 어떻게 우리 삶의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묻고자 한다.

이러한 탐구는 단지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상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의 윤리학이며, 또한 “사람은 상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살아가며, 그 삶이 곧 그의 죽음을 결정짓는다”는 철학적 선언이기도 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신학적 교리나 환상적 이미지로 고정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어떻게 사유하고, 어떻게 느끼며, 무엇을 믿고, 어떤 말을 품고,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왔는가에 따라 형성되는 하나의 존재적 결산이다. 결국 사후 세계가 어떠한 모습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면서 어떤 풍경을 그려왔는가, 내가 어떠한 질서를 믿어왔는가, 내가 어떤 언어를 입에 담아왔는가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철학적 통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로고스의 수식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1장의 이 첫 문장은, 단지 경건한 종교인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전체를 덮고 있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선언이자, 우주의 작동 원리를 가리키는 로고스의 수식이다.

말(λόγος)은 말 그 자체이기 이전에, 세계의 질서를 엮는 이성(ratio)이자 구조(structura)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스토아학파의 정해진 숙명도, 모두 ‘말’이라는 구조를 통과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었다.
요한은 그 로고스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말이 곧 존재의 심장임을 명확히 했다.

이때 말이란, 단지 주어와 동사의 연결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나 사이를 잇는 선언이며, 마음과 현실을 관통하는 설계 언어이다.
우리는 말하는 대로 산다. 아니, 우리는 말한 대로 존재하게 된다.

루터는 “믿음은 고백이다”라고 말했다. 칼 바르트는 “신앙은 단지 심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사건”이라 했다.
즉, 믿음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은밀한 감정이 아니라, 선포되고 외쳐지는 ‘말의 행위’로 실현된다.
그것이 곧 구원이며, 존재의 탄생이다.

그러니 ‘죽음 이후의 세계’ 또한 말과 상상, 믿음과 기억이라는 언어의 장(場)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천국은 신이 설계한 공간이지만, 그 풍경은 각자가 평생 말해온 단어로 채워진다.
지옥은 신의 분노가 아니라, 자기 비난의 언어가 화염이 된 장소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이성적 존재는 죽음 이후에도 그 본질을 유지하며, 신 안에 존재한다.”

버클리는 덧붙인다.
“존재는 지각됨으로써만 존재하며, 신의 인식 안에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칸트는 단언한다.
“영혼의 불멸은 실천이성의 요청이며, 도덕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사유의 틀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우리를 향해 묻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의 흔적은 살아 있는 자의 말 속에 되살아나지 않는가?”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자, 선언이다.
말하는 대로 존재하게 되는 인간,
말한 기억들이 삶의 구조를 짜내는 존재,
그리고 죽은 이후에도 말의 흔적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혼들에 대한 철학적 탐구.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말로 하루를 채우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 우리의 상상, 우리의 욕망, 우리의 농담은
과연 어떤 풍경의 사후 세계를 예비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이 글의 서문은 이렇게 닫힌다.
삶은 로고스의 실현이며, 죽음은 그 문장의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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