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일처럼 보인다.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이들도 실은, 자신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이 자신에게 말해오는 메시지 앞에서 당황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은 단지 그 사람의 끝이 아니라,
나의 시작을 다시 묻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세계의 파괴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확장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철학은 언제나 죽음을 이야기해왔다.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철학은 삶을 가르치지 못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할 수 없다.
스피노자: 죽음을 초월한 존재의 형식
스피노자는 『에티카』 제5부에서 이렇게 썼다.
“지혜로운 자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삶에 대해 묵상한다.”
그의 말은, 죽음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삶의 일부,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의 방식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신의 무한한 양태 중 하나이다.
죽음은 그 양태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존재의 질서 속으로 흡수되는 전이(轉移)일 뿐이다.
그의 철학에서는 죽음 이후를 상상하는 방식조차 ‘지금 여기를 사는 나’의 존재 방식에 달려 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풍경은 내가 죽기 전에 품고 살아온 ‘존재의 상상력’이 결정한다.
하이데거: 존재를 향한 죽음, 죽음을 향한 존재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죽음을 ‘겪는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운명론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이 죽음을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그 죽음을 직면하는 태도, 즉 ‘진정성(Authentizität)’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라 말한다.
결국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궁극의 거울이다.
생텍쥐페리: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죽음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사건’이며,
그것은 단지 끝이 아니라 사라짐을 통해 다시 시작되는 다른 차원의 존재 방식이다.
『야간비행』과 『인간의 대지』를 썼던 생텍쥐페리는
죽음의 순간에도 인간이 어떤 표정을 짓는가, 어떤 기억을 품는가에 대해 끝까지 탐구했다.
그에게 죽음은 인간이 감히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 운명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갖는가가 인간의 존엄을 완성한다.
죽음을 묻는다는 것, 곧 존재의 설계도를 꺼내 보는 일
철학은 죽음을 예언하지 않는다.
철학은 죽음을 설계한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선택하는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품고, 무엇을 꿈꾸며, 어떤 말을 내뱉는가,
이 모든 요소들이 죽음 이후의 형상, 내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세계의 조각들이 된다.
이 말은 단지 은유가 아니다.
불교의 유식학은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고 말하고,
뉴에이지 철학자 제인 로버츠는 “사후 세계는 당신이 믿은 바로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심지어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도 죽음 직전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
문화와 믿음에 따라 다르다는 실험적 근거를 하나씩 쌓고 있다.
결국,
죽음은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 내가 지은 삶의 파편들이 모여 만든 ‘상상의 결산’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사유의 시작이다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어떤 언어로 나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가?
어떤 신념으로 이 하루를 버티고 있는가?
죽음은 단지 심장이 멈추는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품고 살아온 사유들이 나를 대신해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확인받는 사건이다.
그렇기에 철학자는 죽음을 앞두고 침묵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명확하게 묻는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