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死後) 03] 나는 죽음 이후에도 나일까칸트와 쇼펜하우어, 자아의 동일성과 의지의 지속을 묻다

[사후(死後) 03] 나는 죽음 이후에도 나일까<span style='font-size:22px;display: block; margin-top: 14px;'>칸트와 쇼펜하우어, 자아의 동일성과 의지의 지속을 묻다</span>

거울 앞에 선 나는 누구인가.
살아 있는 동안조차 나의 정체는 유동하고 변한다.
기억은 사라지고, 감정은 날마다 흔들린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나 역시 나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유희가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언가를 ‘나답게’ 살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나’란 무엇인가.
그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아의 동일성’은 경험할 수 없으나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라 보았다.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식을 통합하는 ‘통각(Aperzeption)’ 덕분이다.
즉, 우리는 날마다 다른 생각과 감정을 겪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나’로 묶는 초월적 자아가 있다는 전제를 통해
세계와 나를 이해한다.

칸트는 이 자아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지를 논리로 증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실천이성의 요청, 즉 도덕의 근거로서
영혼의 불멸을 ‘필요한 전제’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정의와 도덕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 궁극적 보상을 위한 윤리적 사후 세계가 상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는 우리의 표상이며, 그 기저에는 맹목적이고 무한한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의지의 흐름 위에 잠시 형성된 거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개별성 너머에 있는 이 ‘의지’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고 믿었다.

즉, 죽음은 개별적 자아의 해체일 수는 있어도
세계의 본질인 의지의 흐름에는 단절이 없다.
그 의지 속에 나라는 존재의 흔적, 욕망, 인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나타나고, 다시 구성된다.

이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자아의 지속 가능성을 말하지만
공통된 통찰은 하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나일 수 있으려면,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어떤 나로 살아가는지가 결정적이다.’

죽음 이후에 기억이 없을지라도,
감정이 사라질지라도,
그동안 내가 형성해온 삶의 구조와 습관,
신념과 욕망의 흔적은
의식 너머의 층위에서 ‘또 다른 나’로 이어질 가능성을 품는다.

이 사유는 불교의 업(業),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축적,
그리고 유전학에서의 후성유전(epigenetics) 개념과도 통한다.

결국, ‘나’는 내가 매일같이 쌓아온
감정, 말, 습관, 기도, 선언, 태도, 결단, 후회, 사랑의 조각들로 구성된다.
죽음은 이 조각들을 해체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열하는 사건이다.

나는 죽음 이후에도 나일까?
만약 내가 평생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왔다면,
그 사후의 나도 거짓된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 진짜 나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진짜 나의 흔적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진실하고 무거운가?

죽음 이후에도 내가 나이기를 원한다면,
나는 오늘 반드시 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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