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死後) 04] 상상은 존재의 형식이다낭만주의의 무한 사유와 죽음 너머의 풍경

[사후(死後) 04] 상상은 존재의 형식이다<span style='font-size:22px;display: block; margin-top: 14px;'>낭만주의의 무한 사유와 죽음 너머의 풍경</span>

인간은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죽음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이 상상은 예언이 아니고, 망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를 가늠하고 초월하는 유일한 도구이며,
죽음 이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살아 있는 동안 준비하는 실존적 행위다.

18세기 말,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을 단지 예술적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핵심 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이 유한성 너머의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 믿었다.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노발리스(Novalis)
“죽음은 삶의 로맨틱한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보다 넓은 세계로의 귀환, 더 높은 질서로의 상승이었다.

노발리스는 『푸른 꽃』을 통해
죽음과 사랑, 꿈과 신비가 엮인
초월적 공간을 그려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기 전까지 삶을 알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시적 은유가 아니라,
죽음을 상상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프리드리히 헬더린(Friedrich Hölderlin) 또한
죽음을 ‘그림자의 왕국’이라 부르며,
그곳은 인간 존재가 더 이상 외부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자기 본질과 합일하는 공간이라 노래했다.
그에게 죽음은
불안과 상처로 가득 찬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회귀하는 문턱이었다.

이러한 낭만주의자들의 상상은
현대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공간의 시학(Poétique de l’espace)으로 이어진다.
바슐라르는 인간이 집과 방, 문과 창을 어떻게 상상하는가를 통해
그 사람의 내면 구조, 존재의 상상력, 삶의 사후적 구조까지 탐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말한다.
“상상은 단지 예술의 근거가 아니라,
존재의 심층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미래를 미리 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나의
내면 구조를 드러내는 존재의 지도 그리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 이후의 세계란
어디선가 미리 만들어져 기다리고 있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평생 그려온 이미지, 언어, 풍경, 상상력의 총합으로
형성되는 세계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상상된 존재가 실현되는 시작이다.

내가 상상해온 천국이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한 공간이라면,
나는 그 풍경을 짓기 위해
지금 여기서 어떤 감정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만약 내가 늘 분노와 두려움, 증오와 불안을 품고 있다면
나의 죽음 이후는
그 정서들이 응고된 하나의 세계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의 상상은, 단지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어떤 상상 위에 기초하며,
그 상상이 실제로 세계를 짓는 형식이 된다
는 철학적 명제이다.

죽음은 단지 피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지금 내가 어떤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결정적 응답의 장면이다.

나는 어떤 풍경을 짓고 있는가?
내 언어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있으며,
내 감정은 어떤 빛과 색을 사후의 세계에 뿌리고 있는가?

상상은 존재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 형식은 죽음 이후에도
나를 감싸는 마지막 세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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